조쉬 & 베니 사프디 | 굿타임

Good-Tim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굿타임]을 동생을 사랑한 형의 좌충우돌 모험기로 읽어내려간다고 해도 그 자체로 크게 무리없이 완결된 서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영화는 무척 심심하고 엉성한 작품으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형 코니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코니와 동생 닉이 타고가던 택시에서 갑자기 분홍색 가루가 터지는 순간부터 이 비논리적 연결고리를 이해해야 했다. 영화는 두 형제가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채 경찰에 쫓기게 되는 이 결정적 사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코니가 왜 유태인에게 돈을 맡겨야 하는지, 왜 그에게 압박을 받아야 하는지, 그래서 왜 병원으로 잡입하여 동생을 몰래 꺼내려는 시도를 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영화는 늘 이런 식으로 상냥하지 않게 군다. 그래서 동생 닉을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형 코니가 뉴욕의 어두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해가 뜨고 사건은 종료된다, 라는 서사구조는 심심하고 불완전해 보인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가슴을 때리는 전자음악 등 감각적인 요소들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하지만 평론가 정성일이 주장한 바대로 동생 닉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꿈, 혹은 상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오는 시점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뒤, 닉과 코니가 경찰에 의해 강제적으로 헤어진 뒤부터다. 영화는 코니와 닉이 분리된 시점부터 어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암시를 적극적으로 건네고 있다. 닉이 구치소에서 싸움에 휘말려 정신을 잃은 시점부터 형 코니의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코니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취한다. 연인관계였던 코리는 중년의 여인이지만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했고 아이처럼 울거나 보챈다. 코니를 집으로 들이고 방까지 내어주는 흑인 할머니, 집에 있는 염색약을 마음대로 쓰는 코니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자동차 키까지 내어주는 손녀딸 크리스탈 모두 이유없는 친절함을 베푼다. 특히 열여섯 소녀인 크리스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보여준다. 이 역시 비정상적이다. 닉인줄 알고 병원에서 몰래 데리고 나온 얼치기 죄수 레이와 그의 동료 칼리프 역시 코니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마약의 위치까지 공유하며 코니로 하여금 동생을 빼내오기 위해 돈을 모으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든다. 즉, 이 모든 주요 등장인물은 형 코니가 어떤 정해진 운명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들로 기능할 뿐, 코니의 존재나 코니의 목적을 위협하는 방해요소가 되지 못하는 셈이다. 레이와 함께 훔친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부터 영화는 그들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데, 이건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는 탈주자를 비추는 경찰의 카메라 앵글과 흡사하다. 즉 자신은 병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충분히 인지한 닉의 마음 속에서 형의 영웅적인 노력은 결국 경찰에 의해 저지당할 것이라는 결말이 미리 정해져있던 셈이다. 이 외에도, ‘코니는 닉의 꿈’이라는 가설 안에서,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친절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동생 닉의 모습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닉은 정신병원의 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질의응답을 소화해야 한다. 널리 알려진 문장을 듣고 그 의미를 추리하거나 두 단어 간 관계를 연상하는 등의 간단한 활동이었지만, 닉은 잘 대답하지 못하거나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닉의 이런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닉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고, 정신과 의사는 “코니는 코니대로 옳은 일을 했다”며 닉을 위로한다. 닉은 다른 환자들에 둘러싸여 특정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보이는 활동을 한다. 어떤 질문에도 반응하지 않던 닉은 “가족과 다툰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내 잘못이 아닌데 손가락질당한 적이 있나요?”,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어느새 닉은 방 안에 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카메라와 닉 사이에는 창문이라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닉은 지금까지 그 방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방 안에서 외롭게 혼자 지낼 것임을 알 수 있다. 코니는 닉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친구였으며, 어쩌면 코니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닉이 창조해낸 ‘장르’ 그 자체일 수 있다. 엔싱 시퀀스에 맞춰 흐르는 이기 팝의 노래 가사(“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증언한다.

영화는 퍼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퍼즐같은 재미가 있다. 카메라 앵글 하나하나에 의미가 깃들어 있으며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빛의 강도와 음악의 세기까지 정밀하게 설계된 듯 보인다. 코니와 닉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과 베니 사프디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화면부터 음악까지 거의 모든 요소가 너무나 감각적이어서 자칫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 뉴욕의 낮은 부분을 직설적으로 비춘다는 점에서 매우 사회적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영화의 이곳저곳에 깃들어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굿타임]이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 언크리치 |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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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와 [코코]가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것을 보면 세상에는 재미있는 우연이 참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두 영화는 비슷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완성도부터 결론에 이르는 방식까지 많은 부분에서 ‘수준’ 차이를 보인다. [신과 함께]가 주호민 원작의 미덕 – 주인공 김자홍의 ‘평범함’과 그를 지켜주는 변호사 진기한의 ‘특별함’이 만들어내는 앙상블 – 을 완전히 거세한 채 물리적인 눈물만을 강요한 결과 소름끼치는 졸작이 되어버린 것에 반해, 사후세계에서의 모험을 통해 현실세계를 반추한다는 서사구조를 [신과 함께]와 공유하는 [코코]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 한국영화를 조롱이라도 하듯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 죽음을 ‘축복’하고 있다. [신과 함께]가 관객에게 억지 눈물을 강요하기 위해 동원해야 했던 스토리라인이 무려 가난때문에 부모를 죽여야 한다는 패륜(!)임에 반해, [코코]는 축제를 통해 저승세계로 들어가 “기억해줘!”라는 단순명쾌한 진리를 받아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신과 함께]가 묘사하는 저승은 오로지 처벌과 환생만이 존재하는, 끊임없이 피해다니고 싶은 어두운 공간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눈물로 회개하고 서로를 용서해봤자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늘 위로 솟구치는 군용트럭을 보며 제발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은 [코코]의 저승에서 쉽게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단지 화려한 잔칫상이 가득 차려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곳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온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고,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죽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공간이며, 혼자 죽더라도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함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황홀경 안에서라면 기꺼이 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신과 함께]는 애니메이션에 준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차용하여 상상과 허구의 세상으로 떠나도 좋다는 면죄부를 부여받았지만, 결국 스스로를 강박관념 속에 가두어버리며 영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코코]는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그 어떤 영화보다 독창적인 사후세계를 만들어냈고, 죽음만이 가득할 것 같았던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스스로 획득하였다. 클래스 차이가 너무 나서 감히 비교의 글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코코]는 단지 저승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 뿐 아니라 디즈니의 앞으로의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했다.

금호동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금남시장에서 커피를 마셔야만 한다면

금호동은 커피를 마시기에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다.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은 아직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 곳에 살던 옛 거주민들의 영역이다. 비쭉 솟아오른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금호역, 신금호역, 옥수역, 행당역으로 둘러싸인 이 대규모 중산층 주거지역이 그럴듯한 커피숍을 갖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역설적으로 이곳이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로는 이태원, 왼쪽으로는 한남동, 오른쪽으로는 서울숲과 성수동, 아래로는 압구정과 신사에 15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가진 이 금호동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굳이 용기를 내어 비싼 원두를 취급하는 커피가게가 들어올 경제적 유인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금남시장 근처에서 발이 묶였을 때 커피 한잔 생각이 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나같은 경우, 집에 원두가 떨어졌으나 급하게 커피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그러했다. 이러한 위기가 닥쳤을 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발견한 커피숍 몇 군데를 기록한다. 물론, 이 커피숍들에 가서 커피를 사마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이태원이나 망원동 등 서울시내 주요 상권에서 커피숍의 개점과 폐업 간 시차가 점점 짧아지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고, 이러한 위기가 금호동에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지금 우리가 지나쳐가는 저런 가게들이 과연 몇년 뒤 우리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계속 남아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18년 현재, 조금씩 흥미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금호동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일기장으로서의 가치는 다하지 않을까 싶다.

금호동이 아직 달동네의 모습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 하더라도 금남시장에서 신금호역으로 가로지르는 가파른 언덕길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선구자적인 자세로 이곳에 자리를 잡은 ‘젊은’ 가게들이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골목의 꼭대기 즈음에 자리를 잡은 메그앤스튜디오(Magnstudio coffee)다. 이 가게는 매그놀리아 크리에이티브 랩이라는 광고대행사에서 운영하는 커피숍이다. 그래서 그런지 금호동 언덕길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흰색과 분홍색을 주된 테마 색깔로 잡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산뜻하게 연출하고 있다. 두 개의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게에서 주로 홍보하고 있는 커피 종류는 분홍색의 컨셉에 맞는 배리에이션들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솜사탕 위에 커피를 부어 녹인다던지, 분홍색의 비엔나 커피를 흘러넘치도록 붓는다던지 하는 식으로 ‘비주얼’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시각적 효과를 강조한 커피들이 맛까지 갖춘 경우는 드문데,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원두는 태우기 일쑤였고 물 온도는 지나치게 높았다. 기본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게에 들어서며 커피의 맛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내부 공간이 인상적으로 꾸며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인스타용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주차조차 몹시 불편한 이 금호동 골목길을 찾아나서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겠다. 모든 목적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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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그앤스튜디오에서 금남시장쪽으로 걸어내려가다 보면 원형교차로 부근 골목길에 눈에 띄는 커피숍이 하나 보인다. 이 동네의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는 듯한 간판과 소재마감때문에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테오커피(Theo Coffee)는 우리 부부가 금호동으로 이사올 무렵부터 존재했던 커피숍이다. 집에 원두가 떨어진 어느날 이곳에 들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이후 지금까지 다시 방문하지 않고 있다. 배가 부를 정도의 엄청난 양의 커피는 그렇다치고 오로지 쓴 맛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오직 쓴 맛 하나를 위해 커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공간 내부는 약간의 아늑함과 약간의 어두침침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굳이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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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시장 부근에서 그나마 마실만한 커피숍을 고르라면 루시아 플라워 앤 커피(Lucia Flower & Coffee)를 고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금호역과 집 사이를 오고가는 마을버스 노선 상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갈 때마다 궁금함을 자아냈던 곳인데 마침 오늘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들려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셔볼 수 있었다. 라마르조꼬 머쉰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커피가 일정 수준 이상을 담보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최소한 502커피로스터스의 신선한 램블과 딥씨 블렌드 원두를 사용한다면 최소한 기계에 부끄러운 맛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메리카노는 지나치게 묽은 감이 있었다. 과일향은 희미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금남시장에서 산미를 느낄 수 있는 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에 살짝 감격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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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조금 걸을 용의가 있다면, 금남시장을 벗어나 대우아파트를 끼고 돌아 옥수역까지 걸어간 다음 빈플래토(Bean Plateau)에 다다르기 위한 15분 정도의 시간을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 옥수동과 금호동을 아울러 그나마 마실만한 커피를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커피숍이기 때문에 이정도의 수고는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 빈플래토를 만든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블랙워터이슈에서 다루어진 바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다양한 원산지에서 온 원두를 필터드립으로 내려주는데, 전문 바리스타가 있냐 파트타임 근로자가 있냐의 유무에 따라 필터드립을 마시지 못할 확률도 있다. 어쨌든 이 동네에서는 꽤 균일한 품질의 원두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거의 유일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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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만약 금남시장 한가운데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장 택시나 버스를 타고 그 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금남시장에서 버스를 타면 두세정거장만에 한남동 스타벅스에 다다를 수 있다. 그곳에서 일단 구원을 받은 다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반대편 동쪽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아무거나 잡아타면 언젠가는 서울숲 앞에 내려줄 것이다. 서울숲 뒷편으로 걸어가 매쉬커피를 찾는 것도 좋은 옵션이다. 하지만 금호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애정이 크다면, 그래서 이 동네에서 내려주는 좋은 스페셜티 커피 한잔을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면, 조금은 느긋하게 새로운 가게가 들어오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주 나빠보이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입소문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좋은 가게가 이곳에도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 가게의 첫번째 단골손님이 되는 일도 분명 의미있을 것이다. 나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비록 이 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금호동이 조금 더 재미있는 동네가 되리라는 기대는 접지 않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 셰이프 오브 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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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똑똑하고, 올바르며, 착하고, 다층적이며, 무엇보다 따뜻한 영화다. 크리처(creature)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판타지세계를 그리지만 서사구조 안에 반드시 현실세계에 대한 풍자적 요소를 삽입하는 것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예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현시대에 필요한 교훈을 성인 버전의 우화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서사는 동화답게 단순하고 인물은 명확하다. 주인공으로는 장애를 가진 청소부 여성과 주류사회로부터 쫓겨난 노인, 그리고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고향 아마존에서는 신으로 추앙받았지만 냉전시대에 소련과의 경쟁에 몰입한 미국 권력층에게는 한낱 해부의 대상일 뿐인 존재(자막에는 양서류 인간(amphibian man)으로 나오더라. 아가미와 폐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인가..)가 있다. 주인공 일라이자는 말을 하지 못할 뿐 아침마다 자위를 하고 달걀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예쁜 구두도 깨끗이 닦아 신는, 품위있고 센스있는 여성이다. 그녀의 사랑을 얻는 양서류 인간은 사람을 치유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예술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도 색깔이 분명하다.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보안담당자는 권력과 억압,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폭력적인 문화 전체를 상징한다. 치유와 다양성의 상징인 양서류 인간이 영롱한 청록색 불빛을 내뿜으며 대머리인 노인에게 머리카락을 심어주고 상처를 낫게 해주는 동안, 폭력의 생산자이자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인 보안담당관의 끊어진 손가락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그는 자신의 청록색 캐딜락 자동차가 찌그러진 후 부하의 자동차를 폭압적으로 탈취한다. 사실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고 억압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이 서사의 전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단순한 플롯 안에 다양성과 똘레랑스의 가치, 장애인, 성적 소수자, 그리고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 기반한 폭력의 정당화 등의 주제를 무리없이 녹여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만의 영화라고 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먼저 영국의 자랑이자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인 샐리 호킨스(Sally Hawkins)는 이번 영화에서도 위대한 연기를 펼친다. 상상 속에서의 뮤지컬 씬을 빼고는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않은채 온몸으로 일라이자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1950, 60년대 스탠더드 넘버들도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의상과 특수효과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참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화면 그 자체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어 스틸컷을 따로 구하고 싶어질 정도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씬, 일라이자를 평생 옭아메었던 목의 상처가 사랑하는사람과의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도구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은 영화적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답다.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문법으로 중요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아카데미가 사랑할만한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작품같다.

짐 자무쉬 |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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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패터슨]을 본 후 소감으로 “금호동에 사는 지인 분이 이름을 김호동으로 바꾸면 한국판 패터슨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했다는 글을 적었다. 이후 이 영화에 관심이 생겨 속으로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 운과 때가 맞지 않아 결국 극장에서 보지 못했는데, 오늘 와이프와 함께 IP TV를 통해 집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 나는 지금 금호동에 살고 있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패터슨 시에 사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패터슨 시에 사는 이 남자의 이름도 패터슨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 기억해둘만한 점이라면 이 남자는 버스를 운전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버스운전기사라고 소개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아내도, 패터슨이 시를 쓰기 위해 즐겨찾는 장소인 패터슨 시의 폭포(Great Falls of Passaic River)에서 처음 만난 일본인도,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도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화는 패터슨과 그가 살아가는 패터슨 시의 일상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며 그 일상 사이사이에 패터슨이 직접 쓴 시를 삽입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패터슨은 주로 그의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성냥갑에서, 옛공장 앞에서 만난 10살 남짓의 어린 시인에게서, 또는 버스를 운전하는 도중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의 시가 피어오른다. 즉, 패터슨의 시를 탄생시키는 것은 패터슨 시 그 자체이며, 패터슨과 패터슨 시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력을 획득한다. 패터슨이 일상에서 유독 자주 목격하는 쌍둥이들의 출현이 패터슨과 그의 삶의 터전인 패터슨 시가 시를 통해 하나로 엮여있음을 상징하는 주요한 상징물로 작용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크게 다를 것 없는 그의 일주일을 보여주는데 주력하지만, 전과 다를바 없다고 해서 이 낡고 작은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다반사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교외지역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이라 하면 보통, 나이가 많아 운전을 할 수 없는 노인, 반대로 나이가 너무 어려 운전을 할 수 없는 어린이,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서민층이나 학생 정도일 것이다. 패터슨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인 버스 운전기사 역시 미국에서 그리 럭셔리한 직업은 아니다. 아내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마련한 몇백달러 짜리 기타 앞에서도 움찔할 정도의 얄팍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패터슨의 삶이 유독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의 시가 잔뜩 담긴 비밀노트덕분이다. 이 비밀노트는 비단 패터슨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보물은 아닐 것이다. 그가 매일 들르는 바에서 매일 이별연습을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음에도 비밀노트가 있을 수 있고, 어제 파티에서 만난 금발의 미녀에게 받은 전화번호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 한 찌질한 백인 사내의 마음 속에서 비밀노트가 있을 수 있다. 이 영화는 패터슨 시에 사는 필부필부가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아름다운 영혼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영화 여기저기에 꾹꾹 눌러담아 전달하고 있다. 패터슨 시는 서울의 금호동이 될 수도 있고, 세종시의 도담동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쉽게 잊고 사는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 패터슨이 혼자 길가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녀에게 잠시 옆자리를 내어주는 그정도의 여유, 이 가르침은 매우 작지만 매우 크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였다.

박원순 | 나는 가드너입니다

나는가드너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삶을 살아온 나조차 흙 위를 걸을 때의 반가움과 꽃향기를 맡을 때의 황홀함에 본능적으로 익숙해져있는 것을 보면, 자연이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 속한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뒤덮혀 온전한 흙길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현대 도시 안에 가지런히 박제된 나무와 꽃들의 모습은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 마냥 좋아보이지만은 않는다.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에 억지로 식물을 가져다 놓고 오로지 인간을 위해 전시한다는 의미에서 현대의 동물원을 볼 때의 불편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내가 꽃을 좋아해 가끔 꽃을 한다발씩 사다주고는 하지만, 우리가 꽃병에 꽃을 꽂아놓고 감상하는 행위는 사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식물이 완전히 숨을 완전히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고통과 탄식을 애써 무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은 식물을 사랑한다. [나는 가드너입니다]의 저자 박원순이 에필로그에 적은 문구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식물에 끌리게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 덕후들과 마찬가지로 식물에 미친 식물광또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은이는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중, 원예와 식물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못한 채 아내와 딸을 이끌고 제주도의 한 식물원으로 향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가드닝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보고자 세계 최고의 식물원 중 하나인 롱우드 가든(Longwood Gardens)으로 떠난다. [나는 가드너입니다]는 지은이가 가족을 한국에 남기고 홀홀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롱우드 가든에서 1년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속지는 초록색과 흰색, 두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초록색 속지에 적힌 글에서는 가드너로서의 전문가적 지식을 바탕으로 롱우드 가든의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있다.  흰색 속지에 적힌 글들은 조금 더 캐주얼한 일기 형식으로 적혀있다. 낯선 미국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부터 덕질의 대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일할 때 느껴지는 기쁨까지 식물과 가드닝에 얽힌 다양한 감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타지로 유학을 떠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은이의 고된 유학생활기에 더 큰 관심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은이가 롱우드 가든에서 배운 가드닝은 현대사회가 식물을 대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눈에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잘 자라고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 인간이 보고 싶은 모양을 만들기 위해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배양을 한다. 원래 꽃을 피우는 시기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고 싶은 시기에 꽃을 피우도록 식물을 “속이기”도 한다. 지중해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은 춥고 건조한 펜실베이나의 온실에 잘 마련된 가짜 지중해식 기후 환경에서 계속 성장해야만 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인위적인 식물배양에 대해 아주 짧은 고민만을 한 뒤 이내 그 화려한 결과물에 대해 장황할 정도로 찬양을 늘어놓는다. 결국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으니 좋은게 아니냐는 논리가 기저에 깔려있다. 요즘 인간들이 꽃을 대하는 방식의 전형이라 지은이만을 탓할 수도 없고, 나 역시 그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므로 돌을 던질 자격이 없을 것 같다. 인간이라는 신분 자체가 원죄일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이후 롱우드 가든과 델라웨어 대학이 공동으로 개설한 2년짜리 대학원과정까지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 에버랜드에서 가드너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배워온 ‘선진’ 가드닝 기술이 한국의 정원에도 충실히 이식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에버랜드와 롱우드가든에는 아직 가보지도 못했지만, 한국의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이 마냥 예뻐보인다. 그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Typhoon | Offerings

typhoon
타이푼(Typhoon)의 노래 “Empiricist”를 NPR의 All Music Considered 팟캐스트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이고 행동거지를 바지런하게 가다듬었다. 노래가 끝난 뒤 팟캐스트를 통해 두 DJ의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Empiricist”는 참으로 신기한 노래였다. 8분이 넘는 이 긴 곡은 지루할 틈 없이 서정성을 맹렬하게 내뿜는다. 서정적이라는 표현과 맹렬하다는 표현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노래는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들끓는듯한 마음을 단정한, 하지만 만연체의 수필로 꾹꾹 눌러담은 듯한 이 기묘한 곡은 나로 하여금 타이푼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타이푼은 오레곤주 살렘(Salem) 출신 밴드다. 밴드 멤버는 모두 열두명에 이른다. 밴드라기 보다는 작은 오케스트라, 혹은 빅밴드의 형태에 가깝다. 노래를 부르고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하며 가사를 쓰는 카일 모튼(Kyle Morton)이 밴드의 핵심이다. 현재 오레곤주 포틀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포틀랜드 기반 밴드인 디셈버리스트(The Decemberists)나 밴드의 구성이 비슷한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가 비교대상으르 주로 거론되지만, 타이푼의 네번째 음반 [Offerings]만 듣고나면 오히려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나 나띵(Nothing)같은 슈게이징 밴드가 먼저 생각난다. 로우(Low)로 대표되는 슬로코어 음악들도 연상이 된다. 다만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기타노이즈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고자 한다면 타이푼은 기타에만 의존하지 않는 풍성한 사운드 구성 속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라인을 또박또박 낭독하는 느낌이다. (그럼 결국 다시 아케이드 파이어인가?!) 실제로 [Offerings]는 13개의 노래가 총 네 챕터로 나뉜 구조를 따르고 있다. 밴드 리더 카일 모튼에 따르면 “Floodplains,” “Flood,” “Reckoning,” 그리고 “Afterparty”로 구성된 음반의 네 부분은 뭔가 잘못된 것을 느낀 인간의 심경 변화를 순서대로 나타낸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현대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들의 심오한 철학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음반의 구성에 따라 곡의 성격과 색깔이 명확히 나뉘는 것은 확실히 인지할 수 있다. 음반을 시작하는 첫 세 곡, “Wake,” “Rorschach,” “Empiricist”는 노래 외에 그 어떤 소음도 불필요한 존재로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세 노래가 마치 한 노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결도 좋고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각 노래 안에서의 구성도 좋다. 하지만 이후 음반의 중반 부분은 힘이 달린 듯 뒷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용두사미가 될까 걱정되는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Darker”부터 시작되는 음반의 후반부에 배치된 곡들이다. 첫 세 곡에서 느껴졌던 긴장감을 다시 불어넣으며 음반을 단단하게 마무리한다.

NPR의 팟캐스트 All Songs Considered를 공동 진행하는 로빈 힐튼(Robin Hilton)은 이 노래를 소개하며 “맙소사, 타이푼의 이 음반은 실로 대단하다. (수프얀 스티븐스의) [Carrie and Lowell]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들으며 울음을 터뜨렸다”라고 언급했다. 힐튼의 수사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케 하는 수작이다. 그러고보니 수프얀 스티븐스도 오레곤주 유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레곤 출신 뮤지션들 특유의 서정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제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미쉘 자우너도 어린 시절을 부모님과 오레곤 유진에서 보냈고. 하여튼 그 동네에 뭔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신임교수 연수 첫날

1박 2일 일정으로 신임교수 연수를 받기 위해 지방에 내려와 있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잠자리에 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고 울적한 일인데, 연수 첫날 일정이 일곱시가 채 되기 전 끝나버리는 바람에 이곳에서 굳이 1박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더 우울해졌다. 오늘밤을 보낼 곳은 옛 관광지 근처에 자리잡은 관광호텔이어서 그런지 욕실이 무척 크다. 목욕에 모든 것을 양보한 듯한 객실 구조가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쇠락한 온천 관광지여서 과거의 영광을 초라하게 간직한 유흥가와 온천에 더이상 관심없는 젊은이들을 위한 카페거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호텔 주변을 내일 아침 시간이 닿는대로 둘러볼 생각이다.

나와 함께 이번 학기에 새로 임용되신 분은 모두 열두명 정도인데, 공대쪽 분들은 나보다 훨씬 더 너디한 것 같아 역시 아직 나는 갈 길이 멀구나 싶었고, 의대쪽에서 오신 분들은 일반적인 교수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여 흥미로웠다. 대부분 나처럼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똘망똘망해진 눈망울을 내비치며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조금 더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긴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컸다. 바쁜 연수 와중에도 쉬는 시간마다 어디론가 열심히 전화를 돌리며 네트워킹에 열중하는 남다른 부류도 물론 있었다.

오늘 아마도 이 학교에 있는 보직자 중 높은 분들은 거의 다 본 것 같다. 보직자들의 모습만 보면 이 곳도 한국에 있는 회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돈을 벌고 연구 업적을 쌓아 자리를 보전받는 것까지는 기본,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위계가 높은 사람에게 신임을 얻고 아래로부터는 덕망을 쌓아 더 높은 곳으로 차근차근 올라가고자 하는 사회생활하는 사람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과, 그래서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오묘한 관계의 기술을 갈고닦고자 하는 근면한 삶의 자세를 학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멘토 교수님은 연구업적도 훌륭하시고 보직도 너끈하게 소화하시는 멀티플레이어 유형이신 것 같다. 그 분의 연구실을 물려받아 사용하게 될 것 같은데, 나는 과연 어느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게 될지 궁금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당시 내가 회사생활에 이렇게 잘 적응(?)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막상 학교로 돌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연구에 몰두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지금은 연구비를 어떻게 타낼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총장님의 인사말씀을 듣다가 문득 [보이후드] 생각이 났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수로 일하게 되는데, 집을 수리하러 온 막노동꾼에게 “너는 재능이 있으니 공부를 해보라”고 조언한다. 몇년 뒤, 고급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게 된 그 막노동꾼을 다시 만나게 되고, 매니저가 된 그는 “당신이 내 인생을 바꾸었어요”라고 말하며 그날 식사비를 대신 내겠다고 말한다. 그 장면이 왠지 나에게 하나의 중요한 레슨을 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인생에서 별다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반평생을 교수로 살아가게 될텐데, 죽기 전까지 [보이후드]에서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딱 한번이라도 얻고 싶다. 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런데 막상 교수가 되어 어떻게 커리어를 꾸려갈지 고민하기 시작하자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의 인생을 더 나은 길로 이끌고 싶다는 욕심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을 느낀다. 이런걸 보면 아직 나 자신에 대한 연구도 너무 부족해보인다.

건이로부터 배우는 것들

지난 주말에는 조카 건이를 만나러 갔다. 그가 사는 집에는 하나뿐인 누나도 있고 늘 인자한 자형도 있고 건이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은호도 있지만,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건이를 보러 간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마음가짐도 그러하다. 35년을 형제로 살아온 누나에 대한 애틋함이 조카 건이를 생각할 때의 뭉클함보다 크지 않다고 느낄 때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나는 건이를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의 가장 큰 스승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건이는 그의 삶 자체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처음에는 그의 여리고 부드러운 마음씨가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연약하다고 생각해 걱정을 많이 했다. 우는 모습을 참 많이 본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섬세한 마음이 가진 아름다운 색깔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여동생에게 하루종일 시달리면서도 우애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가고 있다. 장난감 하나를 동생에게 빼앗기면 다른 하나를 더 내어준다. 거절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동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형아들의 뒷꽁무니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용기도 가지게 되었다. 동년배의 친구에게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칭찬할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 지구본에 비친 별자리 하나하나에게 애칭을 지어주고 그것을 까먹지 않고 기억하려는 열린 마음은 최근에야 발견한 그의 놀라운 부분이다.

그저 평범해보이는 위와 같은 행동들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감동과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어른들은, 아니 최소한 나는, 건이처럼 마음먹고 건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를 빼앗겼을 때 다른 하나마저 내어줄 수 있는가, 용기를 내어 마음을 건넨 상대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했을 때, 전과 같이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가, 질투와 시기심을 완전히 거둔채 상대방의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고 칭찬할 수 있는가, 아주 미미한 존재에게도 애정을 나누어 주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존중해줄 수 있는가. 나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혹은 그렇게 살아 왔는가. 부끄럽지만 자신있게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건이보다 훨씬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건이가 존경스럽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가 세상을 껴안는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쩌면 오래전에 나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시간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을 수도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건이를 통해 다시 발견한다. 2년 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건이의 입학식에 꼭 참석하고 싶다. 세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달려나가는 시작점에서 그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다. 작년 세상을 떠난 하나뿐인 삼촌은 나의 국민학교 입학식에 와주었고, 나는 둘이 함께 나온 입학식 사진을 아직 가지고 있다. 당시 삼촌이 어떤 생각으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달려와주었는지 이제 더이상 알 길이 없지만, 나의 조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점점 다가오자 나 역시 나의 삼촌처럼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건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순간을 직접 지켜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조카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싶은 그런 마음. 건이덕분에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삼촌의 마음 속을 아주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The Edge of Daybreak | Eyes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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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즐겨보았다. 회차마다 챙겨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심히 시청했다.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얼마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된 만화를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고, 이때부터 교도소 생활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여러 매체의 평을 종합해보면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실제 교도소 생활에 대한 고증이 꽤 잘된 편이라고 한다. 눈으로 보여지는 구체적인 생활상을 재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위의 만화와 드라마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꽤 섬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교도소에 들어간, 소위 죄를 지은 사람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은 ‘일반인’이 쉽게 깔아뭉개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조금 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말해보자면, 감옥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은 맑고 건강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흔히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 중 하나로 블루스를 꼽는다. 이 블루스의 형식을 만든 ‘시조’ 중 상당수가 감옥생활을 하던 흑인 노예들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더이상 그리 놀랍지 않은 부분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백인 주인을 살해한 노예, 배가 너무 고파 먹을 것을 훔친 노예, 매를 맞는 것이 너무 아파 구역을 벗어나 도망치다 잡힌 노예, 그외 이런저런 이유로 감옥에서 만난 흑인들이 모여 신세를 한탄하며 흥얼거린 가락이 구전으로 전해져 블루스라는 짧고 우울한 형식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오히려 감옥이라는 삭막한 공간에서조차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눈에는, 이들에게 감옥 안에서 노래 한줄 부를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엄청난 특혜나 불평등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옥과 평생 인연을 맺을 일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죄수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처벌’에 대한 중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이들에게 허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조차 박탈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1970년대 버지니아 주립 교도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6년에서 60년까지 다양한 형량을 선고받은 흑인들이 ‘포우헤이튼(Powhatan)’이라는 애칭을 가진 버지니아 주립교도소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단순 강도부터 살인까지, 이들의 죄목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 꽤 괜찮은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던 맥어보이 첼리스 로빈슨(McEvoy Chellis Robinson)은 열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들끼리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1969년 약국에서 물건을 훔친 죄로 구속되었다. 제임스 캐링턴(James Carrington)은 가스펠 그룹에서 활동하며 버지니아 지역의 뛰어난 R&B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사귀던 백인 여자친구의 부모가 그를 여자친구 폭행혐의로 고발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렸다. 자할 누비(Jamal Jahal Nubi)의 아버지는 블루스맨이었다. 그 역시 버지니아 지역에서 다양한 그룹을 이끌며 퍼커션 주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어느 파티에서 친구들이 그의 차를 몰래 훔쳐타고 나간 사건이 발생했고, 그 차가 나중에 범죄단체에 이용되면서 차의 주인이었던 누비는 순식간에 공범으로 몰려 구속되었다. 이 외에도 코넬리우스 “닐” 케이드(Cornelius “Neal” Cade), 해리 콜먼(Harry Coleman) 등 각자의 사연을 가진 ‘전직’ 음악가들이 교도소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감옥에서 만나 엣지 오브 데이브레이크(The Edge of Daybreak)라는 그룹을 결성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누메로(Numero) 레코드에서 내놓은 61번째 복각판은 이 엣지 오브 데이브레이크라는 그룹이 포우헤이튼 교도소에서 만든 최초이자 마지막 정규 음반 [Eyes of Love]다. 이 음반은 1979년 9월 14일, 단 하루, 다섯시간만에 녹음되었다. 그룹의 멤버 캐링턴은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에 위치한 알파 오디오(Alpha Audio) 스튜디오에 녹음을 부탁했지만, 교도소 당국은 보안상의 이유로 외부 녹음을 거절했다. 당시 3천불 정도였던 녹음비용 역시 죄수 신분이었던 그룹 멤버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당시 알파 오디오의 사장이 모든 금액을 지불하고 8명의 특별 감시관을 추가로 고용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의 감시 하에 녹음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다섯시간 뿐이었다. 모든 곡은 원테이크 형식으로 녹음되어야 했다. 음반에 수록된 8곡 중 “Our Love”는 교도소측의 빨리 끝내라는 독촉을 받으며 서둘러 녹음된 노래다. 그 와중에 지역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비싼 퍼커션까지 빌려 녹음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Eyes of Love]는 1980년 몇몇 지역 라디오와 언론에서 주목하기도 했지만, 초판으로 발매된 약 3천장의 음반이 홍수로 인해 유실되면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멤버들은 각기 다른 교도소로 뿔뿔히 흩어졌고, 두번째 음반은 녹음되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떤 멤버는 출소하여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했지만, 다른 멤버는 끝내 바깥 공기를 다시 마시지 못하고 교도소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이 음반은 버지니아 로어노크시의 한 레코드샵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이후 누메로 레코드를 통해 복각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이 완성한 8곡의 소울-블루스 발라드는 무척 아름답다. 다섯시간만에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만큼 여유롭고 따뜻하다. 이 음반의 발매사는 ‘포우헤이튼 교정당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위와 같은 뒷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음반을 처음 듣는다면 꽤 특이한 이름을 가진 레이블이 훌륭한 음반을 발매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옥이라는 삭막함(이 역시 평범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악기 연주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단 여덟곡만이 존재하는 바람에 바이닐의 앞뒷면을 뒤집고 다시 플레이시키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듣고 또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 음반을 계속해서 플레이시키면서, 더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영혼을, 우리가 감히 재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