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좋은 한국 소설을 읽었다.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는 서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 작가의 손에서 나온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인간에 대한 작가의 근심과 애정을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불리는 장르 위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알몸 그대로의 인간사회를 펼쳐 놓은 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 폐허 속에서도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는 작가의 방식이 무척 우직하게 느껴진다. 과장되지 않게 느껴지는 가정들을 차곡 차곡 쌓아 나가며 그 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본질적 요소를 간결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방법론에 저절로 동의하게 된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결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을 한 작품에서 이렇게나 많이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한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런 문장들이 촘촘히 모여 허술하지 않은 서사를 이루고, 그 서사를 통해 단 하나의 단어,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추상적인 그 단어 하나로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책을 읽을 때 설렁설렁 빠르게 읽어내려가는 습관이 있는데 이 소설의 경우 조사 하나 빠트리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 그렇게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