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

026-머리부터천천히_앞-600x883
박솔뫼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문장은 완벽하게 문학적이고 소설은 온전히 문학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그녀의 작품을 비유하기 위해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이다. 문학이라는 필름 위에 문장이라는 배우를 등장시켜 글자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능력은 ‘기묘하다’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고심 끝에 내가 떠올린 영화는 데이빗 린치와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조금 불편한 이미지들로 서사를 구성하되 메타-필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영화적 언어에 능통한 다층적 성격을 지닌 작품들이 떠올랐다. <머리부터 천천히>는 장황하고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학적 이미지가 감지되고, 다시 그 낯선 이미지들의 연결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절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이야기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들처럼, 어떤 공간에 있지만 그 공간에 있지 않은 초현실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인물을 통해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을 빙빙 돌려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어쩌면 문학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와 같은 서사를 다루는 다른 예술 장르로 절대 재현할 수 없는 문학만의 미덕을 충실히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학 내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문체와 주제전달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챕터간 구성이 치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챕터별로 화자와 주요인물이 바뀌다 보니 서사구조가 아닌 소설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를 따라가는 것조차 조금 벅찰 때가 있었다. 물론 그조차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w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