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en and Ethan Coen: Inside Llewyn Da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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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인생을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실패한 뮤지션의 이야기를 보러 가는 길은 약간의 반가움과 약간의 불안감이 공존했다. 원하는 궤도에 오르지 못한채 그 변방을 떠돌기만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며 느끼는 동질감이 더 클지 ‘그래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실패에 대한 확신을 더 굳히게 만들지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영화를 막 보고 나온 지금, 코언 형제의 신작은 밝음보다는 어두움, 희망보다는 절망에 조금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는 듯 느껴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시퀀스를 약간의 비틈을 허용하며 조응을 이루는데, 그것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결국 주인공이 이 불행의 터널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는 운명론적 시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코언 형제는 늘 그런 식이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도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악을 설정하며 결국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했고, <그 남자 거기 없었다> 에서도 끊임없이 굴러가는 바퀴처럼 비극적인 결말은 결코 그 어떤 다른 대안으로 치환될 수 없음을 강하게 드러냈던 그들이었다. 물론 코언 형제는 비극과 희극, 정극과 소동극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줄 아는 재주꾼이다. 그들의 영화는 키득거리는 유머와 서늘한 비장미가 늘 함께 공존하며 그것을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관조의 시선으로 연결짓는 통로로 사용하기 때문에 젊은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일게다. 박찬욱이나 김지운같은 감독들이 아마도 가장 따라하고 싶어하는 감독일 것이며, 알맹이가 결여된 이들 한국 감독들이 결코 코언 형제의 영화 세계를 완벽하게 흉내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르윈 데이비스라는 인물의 구슬프고도 고단한 여정에 동참하다 보면, 르윈의 피곤한 눈빛처럼 영화도 힘을 힘껏 주지 않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한결같이 유지하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결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기대했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서늘한 맛이 느껴지긴 하지만 익숙한 서늘함일 뿐이며, 곳곳에 배치된 유머는 유머 그 자체로 겉돌뿐 핵심으로 깊게 파고들지 못한다. 문제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Oscar Isaac 이 연기하는 르윈 데이비스의 캐릭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어떤 인물인가? “돈이 되지 않는”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경제적 파탄에 이르게 되고, 친구 뮤지션의 파트너와 잠자리를 함께 해서 덜컥 임신을 시키고 (혹은 시켰다는 의심을 사고), 매일밤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잠을 자야 하며 거의 구걸을 해서 겨우 도착한 시카고에서는 오디션에서 퇴짜를 맞는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운전중에 부딪힌 동물에게 극도의 미안함을 느끼며 잃어버린 후원자의 고양이를 찾기 위해 애쓰는 순박한 사람이지만 이와 동시에 fuck과 shit을 입에 달고 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뮤지션의 공연을 망치려고 드는 거친 사내이기도 하다. 그는 피곤에 지쳐 결국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포크뮤직씬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고 폭력과 야유에 노출되어 있는 가난한 지하 클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내일은 어디서 잘 것이며, 그 다음날은 과연 무사할 것인가. 그에게 허락된 지속적인 안락함은 없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타박하지만 결코 그를 내치지 않는다. 문제는 그에게 있다. 그의 내부에 있다. 르윈 데이비스의 “인사이드”가 이 영화의 핵심 철학을 발견하는 key라면 그 내면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감독의 의무일 것이다. 우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깔끔한 캐릭터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캐릭터를 과연 행동의 나열 이상의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오스카 아이작이 부루는 포크 넘버들은 분명히 아름답다. 하지만 공허한 눈을 한채 자신의 삶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 주인공에게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으며 무엇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실패한 인생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좋은 영화라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 이 영화가 짧은 결말에서 그 모든 숙제들을 능숙하게 주워 담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데이비스를 둘러싼 주변인들 역시 깔끔한 영화 화면과는 다르게 흐리멍텅한 색으로 기억된다. 르윈 데이비스는 갈팡질팡하지만 결국 어떤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는 끝나 버린다. “영화는 인생의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 보여주는 것일뿐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이창동의 주장에 코언 형제가 동의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지난 영화들과 아주 다른 시각일 것이다. 주변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제시켜 놓은 동물들처럼 움직인다. 캐리 멀리건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얼굴로 거친 욕설을 쏟아내는 장면 말고는 기억에 딱히 남는 것이 없다. 저스틴 팀벌레이크도 마찬가지. 시카고 여행의 동반자들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했지만 그들은 결국 맥거핀으로 쓰일 뿐이었다. 어짜피 이 영화의 조연들은 모두 르윈 데이비스의 내면을 보다 더 잘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인데, 결국 난 르윈 데이비스가 무척 힘들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으며, 아무런 메시지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저 실패한 커리어를 살아갔던 1960년 미국 뉴욕 포크씬의 이름없는 뮤지션의 며칠간의 여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다라면, 그건 코언 형제의 영화가 아닐 것이다.

노래는 무척 아름답다. 화면은 곱고 선명하다. 서사는 거의 완벽하다. 카메라는 그들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영화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아마 이들은 카메라와 인물, 카메라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미국 감독일 것이다. 코언 형제는 이 영화를 망치지 않았다. 깐느 영화제 그랑 프리 수상이 그것을 일정 부분 대변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코언 형제 커리어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명작인가, 하면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몇년이 지나고 이 영화를 다시 한번 보면 그때는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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