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s having way better life through SNS, even though you hate it.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부터 집어 든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여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iMessage 로 보내는거라 따로 돈이 들지 않는다. 사진도 주고 받고, 여건이 허락되면 Viber를 이용해 역시 공짜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Facetime 을 이용해 화상 통화를 하기도 한다. 아이폰끼리는 페이스타임도 공짜다. 이불 속에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으면 트위터를 켠다. 자는 동안 삼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지껄였던 흔적들을 훑어 본다. 요즘은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이나 신문 대신 휴대폰을 들고 간다. 짤막하게 끊어지는 무한도전을 유튜브로 보면 안성맞춤이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다가 지겨우면 트위터를 수시로 연다. 졸음이 몰려오는 늦은 오후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나와 마찬가지로) 이불 속에서 트위터를 열어볼 시간이다. 타이밍이 맞으면 여러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주로 신변 잡기다. 아스널 욕을 하다가 르브론 제임스 흉을 보기도 하고 세계 경제에 대해 짐짓 심각한 척 토론을 하기도 한다. 하루, 혹은 이틀에 한번은 페이스북에 들어간다. 페이스북은 오프라인 지인들과 온라인 상에서 교류를 나누는 장소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소식을 업데이트하기도 하고 여기 볼더에서 함께 생활하는 대학원 친구들이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Like 버튼을 눌러주면 내가 그들의 소식을 잘 접하고 있다는 시그널이 될 것 같아 가끔 정말 좋아하지 않아도 누를 때가 있다.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여러가지 구차스러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냥 사진 한장을 올림으로써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폰은 화면도 작아서 그냥 대충 찍어서 필터만 좀 뒤집어 씌우면 꽤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사진을 잘 못 찍는 사람들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다. 여기서 더 나가면 자신이 어디에 가는지 위치 정보를 공유하는 포스퀘어를 할 수도 있다. 난 포스퀘어는 즐기지 않는 편이다.

어떤 평범한 축구팀의 노감독이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 라고 말했다. 소속팀의 평범한 축구선수가 SNS를 통해 팬과 언쟁을 벌인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말은 후에 SNS 를 하다가 큰 사고를 치는 사람들을 비꼴때마다 “트인낭” 이라는 줄임말로 대차게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NBA 의 한 평범한 팀에 소속된 르브론 제임스라는 선수가 공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경찰의 호위 속에 역주행을 얼마간 했는데 이것을 비디오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이를 자랑하듯 트위터에 밝혀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리고 많은 농구팬들이 이런 그의 행동을 비난하자 “바이러스나 풍기고 있다” 며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멘트를 추가로 덧붙였다. 이럴때 “트인낭” 이라며 SNS 전체를 깎아 내리는 사람들이 꼭 등장한다. 마치 르브론 제임스가 SNS 를 하지 않았으면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지 않았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제임스라는 상식 수준 이하의 인격을 가진 농구 선수가 SNS 를 잘못 사용하면서 벌어진 하나의 큰 해프닝이 어떤 이에게는 SNS 때문에 그의 인격이 공개되는 것처럼 비추어지나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SNS 라는 매개체가 인류의 삶을 궁극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물론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발명품이 그러하듯이 이 매체도 장단점이 분명하다. 르브론 제임스처럼 이 매체의 특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더해 자신의 상식 수준 이하의 판단력을 결부시키면 당연히 사고를 칠 수 밖에 없다. SNS 뿐만이 아닐 것이다. 만약 변희재가 20년전 사람이라면 그는 조선 일보나 일요 신문들의 매개체를 통해 입으로 똥을 싸는 행위를 반복했을 것이다. 만약 그에게 허락된 대중 매체가 없었다면 최소한 술자리에서 그의 지인들이 그의 똥을 받아내야 하는 고통을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

SNS 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신의 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인류의 탄생때부터 존재해 왔던 이웃간의 담화를 온라인에 이식시켜 놓은 물리적인 작업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부터 친구들과 다른 친구를 험담하는 행위를 즐겼다. 독재 시절 우리의 아버지들은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목소리를 낮추어 가며 박정희를 욕했다. 조선시대에도 못난 임금의 실정을 비꼬는 풍자극은 저잣거리에서 항상 호황이었다. 인간은 권력과 계급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낮은 계급은 높은 계급을 비꼬는 행위를 통해 심리적으로 처벌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트있게 구사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그러한 행위는 인류의 탄생때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터넷이 보급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행위를 온라인에서 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다. 처음에는 온라인 상의 글과 댓글이라는, 상당히 고전적인 형태의 담화를 그대로 이식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인간의 창의력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조금 더 재미있는 형태의 담화를 온라인상에서 가능케 만들었다. 모니터를 통해 긴 글을 보는 것이 지켜워질 무렵 트위터라는 초간단형 수다방이 개설되었고 크게 히트를 쳤다. 페이스북은 조금 더 무겁지만 “Like” 라는 아주 편리한 대꾸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역시 히트했다.

인터넷 상의 수다방에는 물론 과거와 단절되는 특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기성 언론이 인터넷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기성 언론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저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것으로 소일삼던 트위터상의 담화들은 어느새 하나의 “발표문” 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사고를 친 유명 연예인들은 트위터를 통해 성명을 발표한다. 급기야 공중파 방송의 메인 뉴스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해명이 트위터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뉴스를 보지 않고 신문을 읽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에 들어가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구글링하거나 트위터를 한번 휙 보는 것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가늠하고 만다. 사실 그정도 노력만으로 대부분의 것들이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 요즘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어난 돌연변이가 이외수나 공지영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팔로워가 마치 자신을 호위하는 군대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트위터 팔로워 수를 가지고 있을 수록 이들이 갖는 ‘보이스 파워’ 는 증가하며 때문에 이들이 사회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파워가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어리석은 정치인들과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이런 “파워 트위터리안” 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연쇄 충돌로 인해 실제로 일어나고 마는 현상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SNS 를 통해 누리는 이익만큼 손해도 보면서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트인낭” 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유명인들의 SNS 와 일반인들의 SNS 는 어떤 순간 그 층위를 달리 한다. 맨 처음 밝힌 바와 나는 개인적으로 SNS 를 통해 많은 혜택을 누리는 편이다. 애인과 공짜로 연락을 수시로 주고 받을 수 있으며 이는 7,8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스마트폰과 SNS 가 없었다면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지도, 관계를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는 SNS 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혹은 더 높은 수준의 정보를, 내가 임의적으로 지정한 특정 필터를 통해 선별적으로 접할 수 있다.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경제학자들, 경제 기관들, 혹은 언론매체들은 트위터를 활용해 속보를 전하고 분석을 업데이트하며 자료를 공유한다. 예전같으면 도서관에서 며칠을 기다려야 접할 수 있던 자료들이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둥둥 떠다녔으나 이를 선별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다면 이제는 SNS를 통해 내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자료들이 내 식탁에 자동으로 차려지는 셈이다. 나는 그저 트위터를 조금 들여다 보고 즐겨찾기에 저장해 두면 그만이다. 거의 모든 경제 분석 자료들의 출발점이 트위터에서 나온다. 스포츠에서의 변혁은 실로 획기적이다. NBA 를 필두로 거의 모든 서양 스포츠 스타들은 트위터 계정을 가지고 있으며 스포츠 기자들과 애널리스트 역시 트위터를 활용해 거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한다. 예전같으면 ESPN 홈페이지에 “찾아” 들어가야 했다면 이젠 이들이 나의 트위터 타임 라인에 모든 정보를 “배달” 해주는 셈이다.

이러한 정보의 “흐름” 의 변화는 간단하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 세상이 점점 커지면서 정보 공급자들은 더 높은 수준의 경쟁을 감수해야 하고 트위터등의 SNS 를 통해 판촉활동을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정보 공급자가 대부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pre-SNS era 에 비해 post-SNS era 는 정보 소비자들에게 권력이 많이 넘어온 상태다. 이걸 인터넷 세상에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색채가 강해졌다고 해석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의 민주주의는 계급의 출동과 함께 계급의 결속 또한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NBA 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은 순전히 운에 의존해야 했다. 같은 반에, 혹은 주변에 그런 취미를 가진 친구가 존재해야만 나는 누군가와 농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인터넷이 생기면서 이러한 “거래비용” 은 큰 폭으로 감소되었다. NBA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하면 최소한의 공유 욕구를 풀리기 때문이다. SNS 를 이용하면 정보 소비자간의 거리를 더 큰 폭으로 좁힐 수 있다.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뛰어 넘어 친목을 다질 수도 있고 조금 더 오프라인에서의 수다에 가까운 대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 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보의 소비를 조금 더 경제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혹시 아직도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가 오프라인 상에서의 그것보다 비교 열위에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트인낭” 이라고 중얼거리며 SNS 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들이 정녕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인 삶의 행태를 가지고 있는 불쌍한 중생들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도 인터넷을 한다. 일베에 들어가서 노무현을 비꼬거나 엠팍에 들어가 운영진 물러나라며 투쟁하던가 소드에서 수다를 떨던가 이종에서 동물 대 인간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 들여지고 일종의 필수적인 소비재로 인식되는 데에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젠 늙은 노인들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야 뭔가 숨을 쉬는 기분이 드는 그런 분위기에 살고 있다. 전국민이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싸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크게 잘못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인터넷과 SNS 를 그저 삶의 한 부분, 혹은 부가적인 수단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인터넷을 슬기롭게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놀라운 수준의 부를 창출하거나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상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극소수의 실패자들, 예를 들어 알몸 사진이 유출되었거나 해킹을 당하거나 사기를 치다가 실패해 감방에 들어간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개인의 혜택을 통칭해 welfare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개개인의 혜택을 사회적으로 다 합치면 이것을 social welfare 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social welfare 를 증가시켰는가?  maybe yes. 그렇다면 SNS 는? yes as well. 인류는 항상 진화한다. 거시적으로 항상 상승하는 그래프를 그리며 살아온 존재가 인류다. 부분적으로 침몰하는 시기도 있었고 허둥지둥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추세선은 항상 상승 곡선이었다. SNS 는 그러한 인류가 세상에 내놓은 최신 발명품이고,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혜택을 얻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국에서 유독 “트인낭” 이 유행하는 현상을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정 형질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한국인들은 앞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 한다. “뒷담화” 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고 프로필 사진에 자신의 진짜 사진을 이용하기를 꺼려 한다. 차라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하나 다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익명으로,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마음껏 배설 욕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뒷담화를 두려워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열차게 타인에 대한 뒷담화에 열중하는 것이 또 이 한국인들이다. 이들은 겁이 많지만, 타인의 두려움을 이해할 정도로 마음이 넓지도 않다. 이것은 다분이 유전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통일 신라 이후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왔고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로 갈라져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싸워 왔으며 계급 사회 안에서 말 한마디 잘못 하면 목숨이 날라가는 분위기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야 했던 조상들이다. 그들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들이 일제시대와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그 “겁” 을 상당 수준으로 부풀려 왔고 현재 인터넷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유전적 형질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다. 물론 아직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예전의 병폐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겁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SNS 를 통해 얻게될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욕먹을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행동하고 말하며 상식 수준에서 생각하고 말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만에 하나 SNS상에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긴다 해도, 오프라인에서처럼 그냥 풀어 나가면 된다. 때로는 상처가 되고 때로는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싫어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전체 인구중 몇퍼센트나 될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유독 한국에서 “트인낭” 이 유행하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가면 거짓말을 아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또다른 국민성을 탓해야 겠지만, 그러면 너무 매국노로 몰릴까봐 이쯤에서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2 thoughts on “people is having way better life through SNS, even though you hate it.

  1. 빌 클린턴의 트윗

    Enjoying @Twitter so far. Where else can you hear from @BillGates @PaulPierce34 @SenJohnMcCain @TheEllenShow @Usher in one day? #thisisgreat

    • 저도 클린터의 트윗에 동의합니다. 정보의 독점 현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는 도구로서 SNS만한게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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