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밥솥

한국에서 돌아와 보니 전기 밥솥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급한대로 홀푸드에서 칼로스 쌀을 싸서 김치도 없이 된장찌개와 함께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들여다 보고 이것저것 눌러 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쌀은 이미 불려 놓았고, 된장찌개 재료들은 완벽하게 손질되어 보글보글 끓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밥을 지을 수 없으니 여간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밥솥을 쓰는 친구에게 물어도 보고 인터넷으로 매뉴얼을 받아 자가진단도 해보았지만 결론은 “수명이 다했다” 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 속을 끓인 뒤 오늘 마침내 큰맘을 먹고 아마존에서 새로운 밥솥을 하나 주문했다. 아마존 프라임의 위엄.. 무거운 전기 밥솥도 배송료 공짜, 그것도 이틀만에 배달된다! 한양마트에서 주문한 음식들은 2주가 다 되어 가는 오늘까지도 감감 무소식인데.

그 밥솥은 3년 반 전쯤 뉴욕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볼더에 들려 쓰던 거라며 툭 던져주고 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쓰던 물건이 아니라 그 친구가 나를 위해 뉴욕에서부터 낑낑거리며 가지고 온 신제품이었다. 영국부터 미국까지 약 5년간의 유학 생활동안 강하게 단련된 그의 살림 실력은 당시 막 2년차에 접어 들고 있던 나에게는 일종의 경외의 대상이었고, 볼더에서 며칠동안 머물며 그는 밥솥과 함께 굴전과 생선전같은 “고급 요리” 들을 만들어주며 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밥솥으로 참 많은 것을 해 먹었다. 쌀밥뿐만이 아니라 찜통이나 다른 비싼 요리도구들이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 밥솥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제 최종 사망 선고를 내린 뒤 그 밥솥을 선물해준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버리지 못할 것 같다고.. 얼마간은 더 간직해야 할 것 같다고.

전기 밥솥에서 밥이 다 되어 갈 때쯤 나오는 희미한 흰색 연기와 냄새를 좋아한다. 다른 요리들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사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아련한 따뜻함을 주는 것이 바로 뜸을 들이는 전기 밥솥이 가지는 매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끈적끈적하고 밀도 높은 압력 밥솥 밥을 잘 삼키지 못한 반면 꼬슬꼬슬하고 건조한 전기 밥솥 밥은 몇공기든 거뜬하게 넘길 정도로 좋아했다. 유학생에게 쌀밥과 김치는 단순히 익숙한 음식 이상의 감정적은 무언가로 다가온다. 한국 음식을 대표하는 이 두가지 음식은 사실 한국에서라면 기본 중의 기본인, 식당에서는 음식의 메뉴에도 등장하지 않는 조연중의 조연이다. 하지만 정작 그 두가지가 없으면 뭔가 식사를 해도 한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 팬티를 입지 않고 청바지를 입었을 때 느껴지는 불안한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기름진 미국 음식, 혹은 접시 하나에 자신의 모든 몫이 담겨져 나오는 서양식 음식을 먹을 때 가장 그리워 지는 것도 찌개도 나물도 김밥도 아닌, 먹은 줄도 모르고 먹었던 흰 쌀밥과 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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