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 Lee: Life of Pi

나는 이 영화를 두가지 다른 이야기로 받아 들였다. 마치 해변가에서 구조된 파이가 자신으 이야기를 믿지 않는 일본인 조사원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는 것처럼, 나 역시 파이와 리처드 파커 (인도 원어민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어떤 이에 따르면 “리차ㄷ 빠ㄹ꺼” ) 가 바다 위 구명 보트 위에서 공생하는 이야기가 주는 상징성을 두가지 다른 버전으로 이해한 셈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영화와 원작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모르지만 사실 원작의 기본적인 세팅 – 소년이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 하나에 의지해서 망망대해를 표류해 나간다는 – 에서 이미 원작과 영화가 품고 있는 주제의식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셈이다.

첫째는 이 영화를 인간이 타인과, 혹은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들과 어떻게 교류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교훈을 담은 우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파이는 구명 보트 위에서 얼룩말 (선장) 과 오랑우탄 (엄마) 을 하이에나 (요리사) 에게 잃는다. 그 하이에나는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에게 죽고, 자신보다 월등히 힘이 센 호랑이를 피해 파이는 배를 내어주고 만다. 이후 지난하게 반복되는 파이와 파커가 함께 생존해 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기적이 되고 경이롭게 받아들여 진다.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이는 자신을 잡아 먹으려는 파커를 눈 앞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른다.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먹이를 줄때나 영역 싸움을 할 때에도 눈을 마주치는 일을 피하지 않는다. 파커가 파이를 떠나 정글로 들어갈 때 그를 끝까지 뒤돌아 보지 않은 것에 대해 파이가 상심해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파커와의 교류에 힘을 쏟았고 그 교류가 파이를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 남게 해주는 주된 기제였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과연 타인에게 이 정도의 정성을 쏟아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잡아 먹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상처를 주는 말들을 골라서 하고, 때로는 무시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려 든다. 이러한 현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끈기와 인내를 가진 대화뿐이라고 이안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이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아마도 이러한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한 현자로서의 이안을 아카데미가 알아본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를 읽는 두번째 방법은 파이가 일본인 조사원들에게 했던 두번째 이야기처럼, 호랑이 파커를 파이 그 자체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상징성을 담은 이야기로 바뀌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파이는 파커를 결코 포기하지 않지만 그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안아주기 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굶어 죽어가는 파커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 쓰다듬어 줄때 비로소 파이와 파커는 완전한 상태의 정신적 교류를 하게 되는데, 이는 파커가 가장 약해진 순간, 혹은 그런 파커를 지켜보는 파이 역시 매우 약해져 있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약해져 있을 때 누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자시 자신밖에 없다.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내가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함으로써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내 자신과 하루에 얼마나 시간을 내어 대화하려고 하는가. 별로 되지 않는다. 부끄럽다. 내 자신의 갈등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어찌 타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몸부터 먼저 닦아 내고 그 다음에 타인을, 더 나아가 사회를 돌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파이와 파커를 하나의 몸 안에 깃든 두개의 상이한 인격체로 이해함으로써 한 개인의 내부에서 발생한 갈등을 어떻게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안 감독은 이 영화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식론과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실존주의를 두개의 각기 다른 프레임 안에서 완전한 형태로 융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사회 문제로 확대시켜 관계와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나를 다듬고, 타인을 보듬고, 그렇게 공생하면 결국 구원이 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가톨릭적 교리까지 얼핏 드러나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모든 이야기를 “나마스떼” 라고 말하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시키는 것도 이안 감독이 가진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는 또다른 통로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대단한 영화이고, 압도적으로 훌륭한 영상미와 그보다 더 뛰어난 감독의 장악 능력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름다운 사운드트랙은 황홀한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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