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시

영화가 끝나기 약 10분 전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미자의 모습이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녀를 향해 차마 웃어보이지조차 못하며 억지로 그녀의 결리는 어깨를 위한 배드민턴 운동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박형사의 표정에서 일말의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고마움은, 미자가 속한 “학부모와 학교, 경찰과 언론” 이라는 한 집단의 도덕성이 갖는 견고함과 박형사가 속한 “시낭송회” 가 갖는 그 도덕성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 만들어내는 작은 균열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자는 이 갈등 사이에서 스스로 고난을 감수하는 유일한 인물이고, 박형사는 <밀양> 에서 송강호가 맡았던 딱 그 정도의 역할에서 미자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도와준다. 십자가를 잠깐 대신 들어주는 시몬과도 같은. 이후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대응 구조를 이루며 하나의 기적을 연출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poem 이 아닌 poetry 로서 존재하는 시는 (즉 구체화된 예술 작품이 아닌 literature 자체로 존재하는 규범으로서의 시는) 한 여학생의 죽음을 구원하지 못하지만, poetry 가 아닌 하나의 poem 그 자체가 되어버린 미자는 그 여학생이 육체로서 현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영화적 기적이다. 영화적 마술이다.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 을 본 이후 이토록 황홀한 기적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미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동네의 모습은 여전히 그 사회의 도덕성이 현존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고, 그 곳에서 완전히 사라진 미자는 하나의 시가 되어 여학생에게 원죄를 구원해 달라고 부탁한다. 미자의 ‘희생’ 은 소녀의 육체적 부활을 영화속에서 가능케 함으로써 시가 상징하는 근원적 아름다움이 현실 집단의 도덕성이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감독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 기적을 바라보며 나는 이창동이 우선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 윤정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 영화는 가톨릭 성서적 세계관을 현실의 도덕 윤리속에 투영한 한 예술가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구원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고난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희생을 통한 아름다움이 영혼의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고독한 탐구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영화들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기도 하면서, 그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을 꽤나 완강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과 이 영화를 연결시키고 싶어했나보다. <밀양> 이 그에게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는 한 사람의 삶의 한 부분’ 을 영화적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시> 는 이창동이 하나의 문법 카테고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거장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와 테오 앙겔로폴로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오즈 야스지로를 모두 한꺼번에 품어낸다. 그리고 이들을 뛰어 넘어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다. 그것은 이창동의 언어고, 이창동의 세계다. 더이상 그에게 어떤 레퍼런스가 더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그는 이제 그의 이름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위치’ 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는 여전히 절망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기적을 무리없이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영화만이 가능한 세계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영화에서 우리는 항상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너무 좋은 영화, 너무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더 설명을 할 수 있을런지.. 내 인생 최고의 한국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오늘 참 힘들었는데 꽤나 큰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 고맙다.

2 thoughts on “이창동: 시

  1. 저도 카톨릭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저희 엄마랑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요. 영화를 보고 꽤 힘들었는데.특히..마지막 장면은..종혁님이 느끼셨던 것 처럼..고통과 위로를 동시에 줬던 것 같아요. 마지막 장면 때문에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

    • 저만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었군요! 마지막 장면은 극단적인 괴로움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라고 느꼈어요. 근데 저도.. 이 영화를 다시 보라고 하면 쉽게 네! 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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