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민.

2000년. 수능을 망쳤다. 모의고사 점수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받았다. 아마도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다. 3교시를 채 마치지 못하고 뛰쳐 나가 구토를 해야 했다. IMF 였다. 미대 입시를 준비했던 누나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경제력이 없던 할머니댁을 동시에 몇년동안 뒷바라지해야 했던 부모님에게는 나를 재수시킬 만한 여력이 없었다. 마침 내가 가진 점수를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대학이 교직원 자녀에게 4년 장학금을 주는 대학이었다. 운이 좋았다. 재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2007년. 제대후 준비했던 한국은행이 TO 를 갑자기 절반으로 줄이면서 나같은 어중간한 준비생들은 갈 곳이 애매해졌다. 미련없이 유학을 준비했다. 한국은행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수학 과목들과 당겨 들었던 대학원 과목들이 내가 레쥬메에 적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었다. 토익도 보지 않았고 경시대회 입상이나 인턴 경력은 전혀 없었다. 유학을 뒤늦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다들 거쳐 간다는 한국의 석사 과정을 밟지 않고 학부를 졸업한 뒤 바로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교수님들의 권유도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다녀 오고 싶었다. 대학원부터는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지원한 열다섯개의 대학들중 가장 “랭킹” 이 낮은 곳에서만 장학금이 포함된 입학 허가가 나왔다.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2012년. 그 랭킹이 가장 낮은 학교에서 나에게 준 5년의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지난 10여년간의 내 인생을 결정지었던 큰 두번의 결정 앞에서 주저했던 것보다 더 큰 머뭇거림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한다. 내 논문은 완성되지 않았고, 당장 보름 뒤 지도교수님들께 논문을 보여 드리며 추천서를 써주십사 부탁해야 한다. 지난주에 만났던 지도교수님은 나에게 조용히 6년차로 가서 1년 더 기다릴 것을 권유하셨다. 당신도 그러하셨다면서, 확실한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잡마켓에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충고해 주셨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나이도 이제 서른이 되었으며 이 지난한 과정을 1년 더 반복해야 한다는 박탈감도 크다.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떨어져서 생길 서글픈 감정이 더 클지,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해서 생길 서글픈 감정이 더 클지는 굳이 비교해 보지 않아도 자명해 보인다. 위의 두번에 걸친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나는 시간과 돈을 선택했다. 내 욕망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두었다. 그 결과 나는 항상 2% 부족한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단 한편의 논문으로 지난 10년간의 서투름과 서두름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미국의 박사 시장은 의외로 단순하고 공정하다. 좋은 연구 성과.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지금 욕망하고 있다. ‘이 정도 쓰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물론 지금 당장 잡마켓에 나갈 수도 있다. 스스로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부모님께서 누누히 강조하셨던 것처럼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과정을 끝마치는 것도 물론 무척 중요하고 가치있다. 그런 수준의 논문을 들고 나가도 취직할 곳은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국의 한 국책, 혹은 대기업 산하 연구소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 알콩달콩 연애를 할 수도 있겠지. 나이도 있으니 결혼도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고,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즐겁게 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족으러운 논문 하나를 쓰고 싶다. 제대로 쓴 논문 하나를 들고 시장에서 정식으로 평가받고 싶다. 그렇게 노력해서라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때 가서 겸허히 결과를 받아 들이고 싶다. 이번만큼은 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해서 성과를 내고 싶다. 그 논문 하나가 뭐 대수라고, 사실 전체 경제학사에서 보면 먼지에 지나지 않을 그 몇십페이지짜리 글이 뭐 그리 큰 의미를 지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맞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하다. 지금 나는 지난 30년간의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대충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지난 30년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 왔는지 그 몇십페이지짜리 종이 쪼가리에 조금이라도 더 정성스럽게 새겨 넣고 싶다.

요즘 하는 고민은 이런 것들이다. 배고프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조금 더 하자. 20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용기를 내고 있는 중이다.

 

8 thoughts on “요즘 고민.

  1. 종혁님 일기를 훔쳐보는것 같은 기분에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요? 하하..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잡마켓에 나가는게 위험하다는건 처지는 다르지만 저는 도시락 싸가지고 쫒아다니면서 말해드릴수 있어요. 흑..

    감정/이성/시간을 다 바쳐서 투자하는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꺼에요. 힘내세요! 배고프더라도 하고 싶은일을 더 할수 있다는 것, 원하는데 원하는만큼 쏟아부을수 있다는게 부양가족 없는 사람의 여유 (..승리자는 부양가족 없는 자유로운 사람들!) 아니겠어요

    • 하하 일기 맞아요. 그리고 훔쳐 보시라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쓰는 건데요 뭐.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최근 며칠동안 정말 심각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어요. 조금씩 명확해 지고 있어요. 조언 너무 감사드리구요.. 취업 선배(?) 님께 조금 더 자문을 구하고 싶지만 너무 바쁘신 것 같아서 나중에 제가 동부 쪽으로 가게 되면 연락 드릴게요!

  2.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 했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신형철-

    힘내세요 좋아보이네요

  3. 대학때 친구가 페북에 올린 글인데 이걸 보자마자 종혁님이 생각났어요.

    “5년차가 되자마자 ‘내년이면 졸업하겠네’, ‘곧 졸업하시네요’ 이런 종류의 소리를 정말 수도 없이 들었다. 심지어 오늘도 들었다.

    내 페북 친구들만이라도 박사 5년차에게 (또는 6년차 또는 7년차에게) 제발 이런 소리 하지 말자. 말하는 사람은 한번 말하는 거지만 듣는 사람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골백번 그 소리 듣고, 하루에도 백번씩 ‘난 언제 졸업하지’, ‘졸업하고 뭐하지’ 하고 잠도 못 자고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최대한 박사 5년차를 즐기면서 하려고 노력 중이고, 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빨리 졸업하겠다는 조바심도 별로 없고, 그것보다는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졸업하는 게 더 큰 목표다. 내가 박사를 5년을 하든, 7년을 하든 그건 어차피 30년 뒤에는 별 의미 없어지지 않나?

    ‘곧 졸업하시겠네요’ 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 연구를 대신해 줄 것도 아닌데, 이 별 것 아닌 듯한,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 이 말이 실제로 박사 고년차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지대하단 말이다. 나이 차이, 거리감, 졸업에 대한 조바심 등이 한꺼번에 몰려온단 말이다. 박사 고년차이신 분을 만났을 때 인사치레로 할 말이 정 없다면, ‘바쁘시겠네요, 힘내세요’ 하고 넘어가자 제발 좀.”

    …하하. 가방끈 짧은 사람입장에서는 100% 이해할수 없지만 참 절절하고 여러가지로 공감가는게 많은 업뎃이더라구요.

    어쨌거나 힘내세요! :)

    • 아.. 정말 너무 공감되는 코멘트인데요.. 저는 이제 왠만큼 단련이 되었지만 하하 그래도 아직 많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죠. 특히 회사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격지심같은 것도 생기고 조바심도 들고.. 언제까지 매달 말 통장 잔고가 제로에 가까워지는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회의감도 들고 그래요.

      그래도 js594 님 가방끈 짧다는 말은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엄청 공부 잘하시잖아요 ㅠㅠ

  4. 매번 써놓으신 글만 슬쩍 보고 갔다가 너무나 공감되는 글이어서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는데요,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go 싸인이 났으므로 별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일단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간이 왔네요.

    저는 미술공부를 하고 있어요. 아마 미술가에게 만족스러운 전시를 하는 날은 평생 오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더 잘할수 있을것 같은 마음은 지워지지 않네요. 하지만 그렇게 들인 시간 끝에도 지금 느끼는 정도의 부족함은 느낄 것 같아서, 지금 느끼는 불안함이나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졸업 후에 할 작업에 끌고가야겠다 생각하면서 졸업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미 가장 후회가 덜 남을 결론을 내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정이 무엇이든지, 지금껏 치열하게 질문하고 또 고민한 시간이 앞으로의 길에 큰 에너지가 될거라고 생각해요. 아무쪼록 힘내서, 즐거운 마음으로, 뚝심있게 마무리 지으시기를 바랄게요.

    생뚱맞은 동병상련(?)을 느끼고 두서없이 써놓고 가네요. 아무튼 화이팅!!!

    • 우선 따뜻한 격려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조금 늦추는 대가로 편안한 마음을 얻었어요. 기회비용은 1년 더 준비하는데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 정도가 될텐데 감수해야 겠죠.

      전시회 준비 잘 하셔서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으시길 바랍니다. 잘 되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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