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레가토


권여선의 장편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짓을 했다. (데뷔작 이후 첫 장편이다!) 뻔히 손해인 줄 알면서도 용기있게 한 인터넷 서점의 해외 배송 서비스를 선택했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배송료를 감수하면서도 주문 버튼을 망설이지 않고 눌렀다. 함께 주문한 책은 김애란의 새 소설집이다.

이 소설은 현재과 과거 어딘가에서 소실된 망각의 시간을 찾아 나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권여선이 그의 단편에서 줄기차게 추구해온 기억과 망각이라는, 같지만 다른 얼굴을 지닌 주제를 장편 소설에 맞는 장르적인 요소들과 함께 넓은 판에 주욱 펼쳐 놓은 느낌이다. 사실 이 소설의 플롯은 서너줄로 모두 표현이 될 만큼 무척 단순하다. 또한 통속적이다. 15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결말이 대충 어떻게 나올 것인지 짐작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 소설이 나름 가지고 있는 반전 또한 궁색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매우 진지하고 또 묵직하다. 그리고 매우 섬세하다. 거의 모든 문장은 꽤 긴 만연체로 이루어져 있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발견되는 고민들의 흔적들은 쉬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인다. 때로는 서사 구조가 아니라 특정 문장의 표현에서 한 작품의 주제 의식을 느낄 수 있기도 한데, 이 소설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문장은 기억과 삶, 시간과 연결같은 것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치밀하다. 이는 서사에 대한 기대가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결코 이 소설이 구조적인 헛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적으로도 아주 긴밀하게 잘 짜여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정성스럽게 읽어 나가야 하는 이유였기도 하다. 넓고 높은 곳에서 이야기의 큰 흐름을 살펴 나가기 보다는 극중 인물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쪽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큰 도움이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작가의 독립적인 문장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권여선의 글의 장점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영화를 읽는다는 느낌이 컸다. <타인의 삶> 의 엔딩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동같은 것도 느꼈던 것 같다. 이 소설에는 약 두세번 정도의 극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그 때마다 권여선의 글솜씨는 여전히 매우 차갑고 냉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서늘한 문체가 오히려 무엇이 뜨거운 것인지를 알려주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좋은 소설을 읽었다.

2 thoughts on “권여선: 레가토

  1. 좋은 소설이라니 안심이 되네요.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거든요.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요. [타인의 삶]이 언급되는 소설이라니,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요.
    그나저나 종혁씨는 이제 권여선 작가를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올린건가요?

    • 세권이나 읽었으니 권여선을 읽는다, 라고 말할 수는 있겠죠? 다만 저는 단편이 장편보다 더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앞으로 단편집이 나오면 또 사서 읽겠죠. 그런데 장편은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읽겠죠? ㅋ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