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생일

몇년 전 사귀었던 여자친구 h는 정말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한가인을 꼭 닮은 외모에 23인치의 허리 사이즈를 자랑하는, 명품을 좋아하고 3개 국어에 능통한 친구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주제에 어떻게 그런 친구와 1년이 넘는 기간동안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 친구에게 딱 한번 y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짤막하게. 그로부터 한참 뒤 h와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y언니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애.”

당시 나는 y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그냥 친한 친구 정도로만 여겼기 때문에 당시 h의 발언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기긴 뭘 이겨, 이건 경쟁이라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넌 내 애인이고 걘 내 친구라고. 게다가 너가 훨씬, 정말 훨씬 더 이뻐.

그로부터 몇년 뒤, 나는 y를 좋아하게 되었고 h와의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진 지금까지 y의 존재는 내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 며칠전이 y의 생일이었다. 카카오톡의 그룹 메시지창에서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친구들의 문자들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나는 y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하필 그날 20년전쯤 읽었던 “어린이 탈무드” 의 내용중 하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뭉뚱그려 요약해 보면 이렇다. A 에게 B 와 C가 돈을 빌리러 갔으나 거절 당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A 가 이젠 돈이 궁해졌다. 그래서 B 에게 돈을 빌리러 갔으나 거절당했다. 탈무드는 이를 “원수 갚음” 이라 칭한다. 그래서 A 는 다시 C 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 C 는 A 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탈무드는 이를 “미워함” 이라고 칭한다.

나는 y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수진 일도 없다. 그래서 그냥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y와 내가 걱정하던 일이 이런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다시는, 예전과 같은 다정한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8 thoughts on “y의 생일

  1. 한가인을 꼭 닮은 외모에 23인치의 허리 사이즈를 자랑하는..ㄷㄷ 종혁님은 선수보다도 대단한 능력자/위너

    • 하하 지금 사귀라면 못 사귀죠. 둘 다 철없을 때 만나서 얼떨결에 사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에 대한 “대가” 도 치루었죠 -_-

  2. 미워하지 않는군요. 에효.. 이글 읽고 자꾸 미워함과 원수 갚음에 대해 생각해요. 저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엇는데 미워하지 못하는게 더 맞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 맞아요.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지 못하는 거죠.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지나간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인 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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