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


어제 쓴 글 하나를 지웠다. 부모님이 내가 앞으로 만날 여자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한 글이었는데 두고 두고 읽을 가치는 떨어지는데 쓸데없는 이슈들만 만들어 낼 것 같아 그냥 지우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 글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온라인상에서 익명성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몇년전 블로그와 트위터, 텀블러, 그리고 내가 활동하는 유일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나의 실명으로 일괄적으로 교체했다. 이유는 크게 네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째, 유치하게 느껴졌다. 실명 의외의 다른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둘째,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익명성 뒤에 숨은 나를 찾아낼 수 있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아요. 콜로라도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국 남자 사람은 끽해야 대여섯명. 그 중에 결혼 안한 사람은 두 세명. 그 중에 잘생긴 사람은 딱 나 하나. 셋째, 익명성 뒤에서 거짓을 생산해 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그렇게 deviate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두고 싶었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거짓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큰 쾌락중 하나다. 근데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다. 넷째, 언젠가는 익명성을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싸리 이 시점부터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난다 작가의 블로그를 읽으면서 익명성과는 별개로 젊은 시절의 나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사진에 찍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왠지 내 얼굴만은 사진은 왜곡의 기술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정도의 변형을 일으킨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적인 불쾌함때문에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내 과거 모습을 단지 기억에만 의존해서 꺼내보는 것은 상당히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사는지를 지속적으로 기록해 두기로 했다. 나의 이십대는 이제 거의 끝나가지만, 30대는 20대보다 조금 더 많은 기록을 남겼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혼자 보기에는 아깝지만.

8 thoughts on “익명성

  1.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익명성 뒤에 숨은 나를 찾아낼 수 있다.” 라는거 정말 공감이에요.
    학부때 하던 블로그에서 신상털린 -_- 일이 갑자기 생각나는데..첨엔 무지 놀랬지만 생각해보니 그다지 어려운게 아니었다는. 하하.

    하지만 그런 일을 다 지나고 옛날 블로그 다시 읽으면 정말 재밌어요. 가는 시간을 막을수는 없지만 지나가는 시간의 조각들을 보관할수 있다는건 정말 좋은것 같아요.

    • 네 저도 그래서 블로그를 몇번씩 바꿔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블로그를 바꾸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 같아요. 어짜피 또 찾아낼텐데..

      전 예전에 이글루스 블로그를 사용했었는데요, 정말 멍청하게도 비밀번호를 잊어 버려서 로그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_- 그때 썼던 글중 다시 읽고 싶은 글이 몇개 있는데 애석합니다 ㅋ

  2. 잘 읽었습니다. 익명성을 포기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다른 얘기지만 사진에 앉아 계신 의자는 어떤 제품인가요? 요새 허리가 아프네요 ㅠㅠ..

    • 제 느낌뿐인 지도 모르겠지만 실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 글을 조금 더 솔직하게 쓸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ㅋ

      의자는.. 차마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싸구려 제품인데요; 타겟에서 그냥 제일 싼 걸로 하나 사서 조립해서 쓰고 있는 겁니다. 저도 허리가 상습적으로 아파서 의자를 바꿔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있네요; 보루네오(..) 가 역시 와따같습니다 하하

    • 잘생긴 사람 진짜 많은데요 카테고리를 저렇게 좁혀 나가면 저 밖에 안 남는다는 얘기 ㅎ

  3. ㅋㅋ 저는 이메일 팔로워? 라서 그 글을 읽었어요 저는 jonghuek님이 좀 부럽네요. 부모님과의 관계가 온전한? 통합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모님이 원하는 거, 상대방이 원하는 거를 잘 알고 거기에 잘 응하는거 좀 사람 관계에서 중요한거 같아요. 좋은게 좋은거라고 요즘 많이 생각하거든요.. 저는 부모님과 그런 관계가 아니라서..

    • 이메일로도 구독할 수 있는 것인가요? 신기하네요. 처음 알았어요. 암튼 ㅋ 저는 고등학교 들어가던 시점부터 부모님께 그냥 절대 복종하고 살자 라고 마음 먹어서 그 이후로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네요. 부모님이 마음이 약하신 분들이라 제가 대들고 성내면 상처 많이 받으시거든요. 저는 참는 것을 잘 하는 성격이고.. 그러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부모님과 마냥 좋기만 한 관계로 지내는 성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 역시 그렇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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