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북촌방향

언젠가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챙겨 보지 않았다. <극장전> 이후인 것 같다. <밤과 낮> 과 <옥희의 영화> 는 인상깊게 봤지만, 그들 조차 <생활의 발견> 이나 <강원도의 힘> 에서 느낀 파괴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코르크 마개를 딴지 이틀은 된 듯한 좋은 와인을 마시는 느낌의 밋밋함이 있었다. <북촌방향> 은 한동안 홍상수의 영화에서 결여되어 있던 어떤 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쁜 영화였다. 씨네21을 통해 재인용하자면 그것은 정성일이 이야기한 “사악한 파토스” 일 수도 있고, 클레어 드니가 언급한 “슬픈 정서” 일 수도 있다. 나는 요즘 세상을 어떤 특정 대상이 가진 에너지의 세기와 깊이로 이해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동안 잊어 버리고 있던 어떤 특수한 색깔의 에너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는 오랜만의 생기로 가득한 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시간을 잃어버린, 혹은 시간 속을 헤엄치는 한 남자가 북촌에 도착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Day He Arrives> 다) 거칠게 이 영화를 쪼개자면 크게 다섯개의 ‘장’ 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들은 시간의 순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자잘한 장치들을 곁들이며 때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들을 순차적으로 등장시킨다. 김보경이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경진/예전이라는 인물은 노골적으로 시간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외에도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라던가 유준상이 연기하는 주인공 성준의 독백을 통해 끊임없이 시간적인 배열이 무너지고 있음을 누구라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이 거의 무의미하게 되어버린 이 영화의 세계에서 대여섯명으로 구성되는 인물들은 영화적인 기교를 만끽하며 능수능란하게 관계를 주고 받는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재미있고,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라던가 낄낄거리게 만드는 홍상수 특유의 해학에만 집중해도 재미있으며, 영화적인 장치들을 하나 하나 해부하며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관객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해석될 수 있는 카멜레온과 같은 영화이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부터 영화를 이제 막 보기 시작한 십대 소년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를 일컬어 우리는 좋은 영화라고 부른다.

이 영화에 대한 좋은 평론은 여기 저기 널려 있으니 나같은 미물이 어설프게 시도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이것 하나만 적어두고 싶다.  책이라는 세계에 어울리는 언어가 있고, 영화라는 세계에 어울리는 언어가 있다. 그 각기 다른 언어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책이라는 세계를 완벽하게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 영화라는 세계를 완벽하게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책이라는 세계에서 놀고 있는, 혹은 놀았던 작가는 쿤데라나 보르헤스가 있다. 영화에는 오즈 야스지로나 홍상수가 있다. 가끔 “이번에도 홍상수야?” 하면서 지겨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 자체가 참 감사한 거다. 이번에도 홍상수다. 홍상수는 이번에도 영화를 만든다. 일종의 축복이다. 다시 에너지를 회복한 그가 만드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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