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갈 수 있을까.

가톨릭 신자로서 경제학을 공부하다 보면 갖게 되는 근원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인간은 부를 추구하고 부를 축적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그것이 신의 뜻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욕망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당이나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듣게 되는 성경에 적힌 구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성경에 적혀 있는 것들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면 우리 모두는 가난해야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교회가 태초에 생길 때부터 그들은 부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불경할지도 모르겠지만, 성직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스템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은 부를 축적하는 사회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즉 이 현대 사회의 굴레를 벗어난 성직자들은 부에서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들이 설교의 대상으로 삼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최소한의 생존 수준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충분히 여유로운 상태’ 를 추구하며, 이에 더해 이 평범한 인간들이 ‘부를 축적할 기회가 주어질 경우’ 이를 거부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개인의 ‘탈렌트’ 에 충실하여 부를 추구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가 미덕이자 ‘천국으로 가는 방법’ 쯤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서 발달한 금융 시장은 ‘돈놓고 돈먹기도 주님의 뜻으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발달해 있는 금융 시장의 대부분의 상품들 – 환시장, 선물시장 등등 – 은 ‘위험을 감수한 자에게 그가 노동을 제공하지 않아도 더 많은 부를 부여하는 형식’ 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도박꾼이 합법적으로 돈을 잘 벌게 만드는 구조인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한 마르크스는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력에 의한 생산물의 가치를 숭상했는데 이게 오히려 고전적인 가톨릭 교리와 더 맞닿아 있다. 우리는 고리세금업자를 천하게 여기는 유태인의 마을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베드로의 극적인 인생 역전 드라마도 잘 알고 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밥먹을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피땀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은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힘들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자본으로 덩치를 불려 나가는 ‘자본가 계급’ 은 책상에 앉아 지시를 내리는 것만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이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소수의 자본가 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계층은 뭔가 자신들의 처지가 불공평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는 일인 일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목소리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문제는 정치 구조는 어찌 어찌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자본 주의의 기본적인 불평등함은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민주주의가 생겨나기 전부터 자본 주의는 발달해 있었고, 그 때부터 시작된 ‘시스템’ 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시스템의 발전이 없이도 충분히 작동하게끔 구성되어 있고 또 견고히 그 시스템을 스스로 보호하게끔 성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흔히 음모론하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입에 담기 즐겨 하는 로스차일즈 가문이 프랑스쪽과 영국쪽 지분을 합쳐 하나의 거대한 회사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과연 이 사람들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부를 가지고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가정해도, 그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자본 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불공평함과 우리 개개인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관계가 있을까?

로스차일즈가 가문에 대한 기사가 나온 신문의 다른 면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톨릭 주교의 기고문이 실렸다. Holy Week 를 맞이해 “부자가 되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주교님이었다. 즉, 더이상 가난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은 옳지 않으며, 단지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과 ‘탐욕스럽게 남의 자유를 침범하며 부를 욕망하는 것’ 사이의 구분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버낸키와 드라기가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 대고 우리 모두가  각자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이기적으로 노력한다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수중에 아주 약간의 돈이 더 많이 들어오면, 아마도 성당에 내는 헌금의 양도 늘어날 것이고, 어쩌면 그 헌금중 극소수는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 가는 한 어린이의 한끼 식사 정도를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아직도 전세계의 대다수는 돈이 없어서 끼니를 굶고 있다.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다는 현실이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나를 포함한, 한국을 포함한, 극소수 선진국들과 개발 도상국들에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이다. 하루에 1달러가 없어서 굶어 죽는다. 1달러만 있으면 하루 세끼를 해결할 수 있을텐데 그게 없어서 굶어 죽는다. 사람 목숨은 다 똑같이 소중하다는 생각, 이거 정착된지 사실 백년도 안된거다. 불과 백년전까지 사람은 계급에 따라 목숨의 경중이 다르게 취급되었고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으며 전세계 70% 에서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아프리카 어딘가, 방글라데시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중 어떤 사람은 원망하겠지. 왜 빌어먹을 예수는 이스라엘 근처에서 태어나서 백인들의 아이돌이 된거야? 애초에 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하고. 그리고 사흘 뒤 에이즈에 걸려 죽으면서 하느님!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도할 거다. 이게 전세계 부의 대부분을 소유한 로스차일즈 가문등의 일부 초대형 부자들의 잘못인가, (그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고 아마도 나보다 훨씬 많은 빈민층의 목숨을 살려 놓았을 것이다. 병주고 약주고일 수도 있지만.) 아니면 오늘 하루도 씨발 되는 일 존나 없네, 앞으로 난 대체 뭘하며 먹고 살까,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뭔놈의 기부는 기부냐, 하고 중얼거리면서 8불짜리 싸구려 중국집에서 프라이드 라이스를 시켜 먹는 와중에 나름 페어 트레이드한답시고 소문난 카페에 가고 유기농 음식 먹는답시고 홀푸드만 골라 가는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애초에 설계를 잘못한 무능한 신이 벌여 놓은 일일까.

7 thoughts on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갈 수 있을까.

  1. 돈 이외의 것으로도 사회 계급이 나뉘었다는 걸 상기해보아도, 과거엔 명목적으로나마 물질이 명예의 수단으로 축적되었던 것이지, 현대처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노골적으로 축적된 역사는 길지 않죠. 심지어 소득 세율을 보면 미국 자본주의 조차 개인이 무한정 돈을 벌어들이는 걸 용인한 역사도 5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전 자본주의의 근본적 불공평함과 개인이 천국의 문을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의 불공평함이 특정 계급을 구조적으로 억압한다면, “남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은 채 부를 축적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으니까요. 욕망은 순결하여 죄가 없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충분히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부분이고. 그런 맥락에서 종교인이 자본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건 모순으로 보여요. 뭐, 좋은 말로는 아주 나이브하다고 평할 순 있겠지만요.

    그런데, 창조론까지는 안가더라도 인간의 설계에 신의 의도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종혁님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레디컬한 분이셨군요.

    • 1.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겠지만, 최소한 “숫자” 로 드러난 면면을 살펴보면 부와 물질의 축적, 그리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풍조는 몇백년, 아니 몇천년 전부터 이루어졌지요. 말씀하신 것은 사회가 법적으로 평등함을 추구한 뒤에도 그러한 풍조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현상같아요. 잉여 생산물의 축적에 관한 통시적인 관찰은 맑스에 의해 미시적으로 거의 분석이 끝났다고 생각해요.

      2.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본주의 안에서 기독교적 교리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일종의 눈가리고 아웅의 문제이죠. 하지만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다른 경제구조가 없는 상황, 여기에 더해 어쩌면 자본주의는 몇천년전부터, 그러니까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지구상에 – 공산주의를 제외하고 – 도미넌트하게 존재했던 하나의 경제구조였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죠. 그래서 전 예수의 존재가 그가 전파한 가르침이 굉장히 극단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당시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런지도 모르죠. 상당히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듯 하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구체적인 예시와 우화를 항상 동반하고 있는데, 그것들중 많은 수가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접근이 가능한 것들이죠. 저는 중세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 자본주의가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채 동물적인 감각에 의해 “탐욕” 에 지배당해 왔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반성과 제어가 필요한 시점 – 이 사실 훨씬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 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3.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부터 사고를 진행해 나갑니다. 물론 그 신의 존재가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조금 궤변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간의 영역에서 품을 수 없는 존재” 라고 확장한다면 그 존재를 믿는 편이 차라리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네요.

    • 1.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부언합니다. “숫자”로 치환되는 물질의 축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명예의 수단으로 축적되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예컨대, <>에 나타난 희랍인의 의식을 살펴보면 당시 희랍인들은 전리품을 획득하여 정당한 몫으로 나누는 걸 매우 중시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닌 ‘명예’의 획득으로 기능하잖아요.
      즉, 잉여 생산물 축적이란 ‘현상’이 언제부터 일어났느냐가 아닌, 부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추구되며 공공연한 시대정신으로 나타난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는 의미였습니다.

      2. 지금 시대에도 혁명적으로 보이는 가르침을 이천 년 전에 설파한 예수의 말씀이 과연 현대 자본주의와 양립 가능할까요? 전 이 부분부터 강한 의문을 품기 때문인지 “현대 자본주의가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진다 한들 가능하기는 할까 싶어요. 신자유주의자 대신 케인지안이 된다고 한들 예수의 말씀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랄까요.

      그런데 제가 잘 몰라서 여쭙는 건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만이 도미넌트한 경제 구조였나요? 제가 공부하기에는 경제 체제를 계급 관계에 따라 수렵/채집, 노예제, 봉건제, 자립 생산 체제, 농업 전제주의, 중앙 계획경제와 동일한 위치에서 자본주의를 분류하고, 미국 경제 또한 “작은 부분에 불과했던 자본주의가 그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성장한 것은 지난 2백 년간의 일”로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잘못 기억하나 싶어 지금 다시 한 번 찾아봤는데 출처는 새뮤엘 보울스 등이 쓴 『자본주의 이해하기』예요. 이들의 주장이 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않는 비주류의 주장에 불과했던 건가요? 궁금해서 여쭤요.

    •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종교를 소재로 삼았기에 사족이 될지라도 노파심에 위의 한 부분을 명확하게 쓰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신자유주의보다는 케인즈주의가 예수가 말했던 “하나님 나라”에 좀더 근접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중요한 행위였던 아픔의 치유와 열린 식탁이 좀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회의입니다.

    •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서 자본주의라고 불리우는 경제 체제는 산업 혁명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정의내릴 수 있겠죠. 그때부터 과학기술과 잉여 생산물의 축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맑스가 이야기하는 잉여 생산물의 축적에 따른 계급의 분화 는 아마도 예수가 태어나던 시점부터 존재했을 겁니다. 계급 체제가 세습화되는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경제 순환 구조는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죠. 왜냐하면 선후 관계의 복잡한 구조는 차치하고서라도 높은 계급에 부가 집중되는 형태는 결국 부의 축적이 하나의 목적성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전 성경이 시대적인 배경 하에서 기술된 하나의 혁명적인 윤리 교과서라고 생각해요. 로만 가톨릭/프로테스탄트 들은 이슬람의 코란이나 동방 정교회의 경전을 거의 읽지 않죠. 그런데 본질적으로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결국 그 시대의 사회/문화/경제적인 배경하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어떤 개혁적인 내용들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 성경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라는 존재가 가상의 인물인지, 그가 실제로 부활해서 승천했는지의 여부보다는 그의 존재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더 나아가 말씀하신 부분, 즉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가 과연 가톨릭적 세계관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케인즈주의가 어떤 대안 혹은 브레이크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저는 굉장히 회의적이예요. 기본적인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움직임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도 답이 아니라는 건 이미 증명이 됐죠. 그건 또하나의 종교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이와는 상반되게 소수의 권력층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공존한다는 것부터가 넌센스라고 생각하고, 이를 수정하기 이해서는 조금 더 큰 틀의 헤게모니 변화기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게 뭔지는 열심히 공부해서 알아내야 겠죠 ㅎㅎ

    • 격하게 동감해요.
      잠시 언급하셔서 하는 말인데 예수와 부처 공자 (마호메트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 모두 농업 문명에서 상업문명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출현하여 새로운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명을 개혁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이었지요. 기본적으로 공통된 역사적 맥락을 가졌기에 근본적 말씀들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봐요. 아직 학계에서는 여러 가설이 있기만 할 뿐 공식적으로 규명되진 않았지만요.

      그런데 종혁님의 논문 주제 혹은 경제학에서 특히 관심 갖는 주제는 어떤 것인지 여쭈어 봐도 되나요? 경제사나 학설사 쪽은 아닌 것 같은데 거시쪽인가요 미시쪽인가요?

    • 나중에 시간이 되면 꼭 공부해 보고 싶은 주제죠.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메이저 종교들의 뿌리가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되게 프랙티컬한 거 해요. 거시쪽인데요, 개발 도상국들의 금융/통화 정책 모델링하는 거예요. 영미 중심으로 발달한 현대 경제학이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 상황을 완전히 반영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네들만을 위한 정책 모델링을 하는 셈이죠. 거시 경제학 분야에서는 꽤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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