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개속의 풍경> 은 중학교 시절에 처음 보았다. 무슨 생각에서 그 비디오테잎을 덥썩 짚었는지 모르겠다. 당시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유럽 영화나 미국 독립 영화를 빌려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는 단지 영화로서 기억속에 존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그런 영화들중 하나다. (친구와 “야한 영화” 를 보겠답시고 <하몽 하몽> 을 빌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이후 다시 한번 도전한답시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를 빌렸고, 이 두 영화가 내 영화 취향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맞다. 열세살, 열네살짜리 꼬마 아이가 <안개속의 풍경> 을 보고 대체 무엇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분명히 (“definitely maybe”..)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볼 당시 그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 느낌이 더 깊은 이해로 인해 변질되는 것이 싫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먹먹해진 가슴이 당시의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 가련한 남매의 삶을 내가 감당할 수 없었을 수도 있고,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 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나의 꿈속에서, 나의 순간 순간의 무의식 속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끔씩 되살아 났다. 그리고 그 장면이 주는 막연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나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언어로써 표현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존재만큼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영화들이 내 인생에 몇 있다.  <하나 그리고 둘> 에서 버스의 창밖으로 비친 타이페이의 거리, <빨간 풍선> 이 쓰다듬으며 지나갔던 빠리의 낡은 건물의 벽들, <미션> 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니로가 보여주었던 눈빛, <비밀과 거짓말> 에서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볼 때 우러나오던 따뜻한 기운, <피아니스트> 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칼을 가슴팍에 푹 질러 넣었던 이자벨 위페르. 등등등.

나는 그래서 영화에 항상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영화를 만든 앙겔로풀로스가 오늘 소천했다. 77세의 그는 영화를 찍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그의 죽음 앞에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나의 무능함이 미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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