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민음사, 2007년.

이 소설은 남아프리카 출신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1950년작이다. 영어 원제는 <THe Grass is Singing>.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메리라는 한 여자가 서서히 붕괴해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도리스 레싱의 첫 장편이자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녀는 1962년작 <황금 노트북> 으로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한두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또 그만큼 대담하다. 하나 하나 짤막하게나마 건드려 보고자 한다.

소설은 메리라는 한 여인이 살해당한 현장에서 시작한다. 소설의 첫 장은 이 여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묘사하는 데에 할애된다. 타자성. 주변들의 시선은 메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기제다. 그녀는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는 성인 여성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그녀를 조급하게 만들고, 결국 그녀로 하여금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결혼을 하게끔 만든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타자의 시선때문에 강요받게 되는 여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타자성은 소설의 뒷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하게 묘사된다. 찰리 슬래터 부부는 메리와 그녀의 남편 리처드의 유일한 백인 이웃이자 메리 부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자성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실체이기도 하다. 슬래터 부인은 메리의 오만한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찰리는 메리때문에 리처드가 파멸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슬래터 부부의 메리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주변 백인 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전파되고, 메리는 육체적인 죽음전에 이미 사회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메리가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중요한 원인들중 하나는 리처드의 경제적 무능함이다. 그는 땅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경제적인 이득으로 바꾸는 능력은 거의 없는 인물이다. 메리는 그의 가난함을 증오하고 혐오하지만 여성이 가진 남성에 대한 사회적 열위때문에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항의하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흑인 하인들에게 풀기 시작한다. 어쨌든, 리처드는 땅을 사랑하지만, 결코 땅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이 일방적인 구애가 비극의 원천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는 땅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에게 닥친 가난은 불행의 결과라고만 믿었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고 철저하게 전통을 따르는 전형적인 남성이다. 그는 메리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해야 했기에 메리를 찾아 냈다. 전형적인 남성성에 대한 공격적인 분위기가 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사랑한 ‘땅’ 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땅, 대지, 혹은 자연 그 자체는 이 소설의 다른 주인공이다. 소설의 무대이자 소설속 주인공들이 삶을 결정짓는 절대자이기도 하다. 메리는 땅을 혐오한다. 그녀는 그 땅에 사로잡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처드를 증오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계절이 없는” 도시에서의 삶에서 멀어지게 한 땅 그 자체에 분노한다. 그녀는 건물안에 틀어 박혀 타이핑하며 돈을 벌고 수백편의 영화를 보며 중독적으로 소설을 읽는 삶을 사랑했지만 결코 그러한 삶속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잃게 된 이유가 남편이 사랑하는 대지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러한 자연에 대한 반감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흑인 역시 싫어했기 때문인데, 이 소설에서 흑인은 자연 그 자체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는 남편과 땅에 대한 증오를 풀 대상으로 흑인 하인들을 택한다. 그녀는 하인들을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습관적으로 하인들을 갈아 치운다. 그녀는 흑인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늘 멸시하고 무시하는데, 정작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그녀의 정신이 거의 붕괴되어 가는 시점에서는 흑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녀의 마지막 하인인 모세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성으로 원초적인 매력을 뽐낸다. 그는 교회에서 교육받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며, 파멸해 가는 메리를 돌봐 주려고 한다. 메리는 흑인에게 돌봄을 당한다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워 하며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만, 결국 모세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그토록 혐오하는 흑인, 혹은 대지 그 자체에 굴복당한 후의 메리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치조차 상실하게 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또다른 주제는 계급문제다. 백인과 흑인간의 계급뿐만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사회 내부에서의 백인간의 계급 문제까지 건드린다. 찰리 슬래터 부부는 성공한 백인 사업가이고, 이들이 무너져가는 리처드에게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유는 “같은 백인이 흑인 수준의 가난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이다. 리처드는 항상 찰리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그토록 사랑하는 땅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찰리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건 그가 태생적으로 백인이기 때문이다. 백인 사회에서 살아 남아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명과도 같은 땅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도리스 레싱은 이 모든 – 어찌 보면 – 거대한 이슈들을 한 여성의 인생에 대한 짤막한 묘사를 통해 정확하고도 직선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이 모든 주제들은 어떻게 한 여성이 붕괴되어 갔는지를 설명하는 도구들이기도 하다. 메리가 붕괴되는 과정은 작품의 마지막 장을 남겨 놓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략 이런 이런 과정을 통해 이런 식으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라는 정도로만 기술될 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장은 그 전까지의 서술 방식과 매우 다른 형식으로 쓰여진다. 마치 위타세라쿤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초현실적인 그녀 내부의 시선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읽는 내내 섬뜩한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그녀가 정신적으로 파멸한 상태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몇 문단에 이르러 흑인 하인 모세의 시선으로 갑자기 바뀌는데 여기서 약간의 심리적인 반전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지 그 자체이고, 이 소설의 제목은 <풀잎은 노래한다> 임을 상기하자.

또하나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소설은 앞서 기술한 대로 1950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영국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이다. 1948년 시작된 아파르트 헤이트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종말을 맞이했고, 1967년 전까지 미국의 남부 17개 주에서 다른 인종간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된 상태였다. 미국에서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건 90년전이다.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최근까지도 상당히 불평등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겠지만. 도리스 레싱은 영국에 정착한 뒤 공산당에 가입했고 헝가리혁명 이후 당을 탈퇴했다. 두번의 이혼을 경험했고 레싱이라는 성은 두번째 남편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녀는 200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 thoughts on “도리스 레싱: 풀잎은 노래한다

  1. 도리스 레싱의 책으로는 ‘알프레드와 에밀리’ 밖에 읽은 것이 없는데, 이 소설이랑 맞닿는 부분이 보이네요. 그 책은 반은 넌픽션, 반은 픽션인데요, 반은 자기 부모님의 실제 삶의 기록이고, 나머지 반은 상상한 삶, 자기가 부모님께 주고 싶은 삶에 대한 이야기에요. 두 분이 정착민으로 고생하고 서로 갈등을 겪은 이야기가 ‘풀잎은 노래한다’에 많이 반영된 것처럼 보입니다.
    뒷맛이 약간 섬뜩한 작가라고 저는 느꼈는데, 어떠셨어요?

    • 역시..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사은님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 메리의 미친 상태를 내면에서부터 보여주는 몇장에 걸친 묘사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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