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상처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만화 <베가본드> 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검을 통해 인생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단지 천하제일이 되고 싶었을 뿐이지만, 정말 천하제일이 되었을 때는 그것이 한낱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검과 결투, 그리고 뒤따르는 죽음을 통해 그는 삶과 인생을 관조한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고 당시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신화적인 존재로 기억될 뿐이다. 이노우에 역시 요시오카 에이치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 를 원작으로 하되 이노우에 자신이 투영코자 하는 철학을 듬뿍 담아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리얼> 과 <베가본드> 는 불교적인 색채에 가까운 그의 철학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무사시는 늘 고행하고 수행하는 승려와 매우 닮아 있다. 내면을 성찰하고 자기 자신과 싸우기를 반복한다. 외부와의 결투는 그저 그가 깨달은 바를 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한가득이다. 상처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그는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의 몸 곳곳에 아로새겨진 상처들은 그의 배움의 과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배움의 과정은 늘 그렇게 상처를 남긴다.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비용인 셈이다. 막상 몸에 칼이 들어올 때는 쓰리고 아플 뿐이지만, 시간이 약간 흐르면 상처를 허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때쯤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된다. 이노우에가 만화에서 그린 무사시는 그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결코 자만하지 않고 늘 자기 자신에게 혹독한 그. 물론 그러한 노력에 더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또한 옳은 것이었기에 그에 따른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나의 삶 역시 그러해야 한다. 나는 나의 직업을 일평생 배우는 것으로 정했는데, 배움에는 free lunch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을 지언정 몸으로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다른 이의 성과물을 보고 와, 하며 감탄하는 수준을 벗어나 따라하고 모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질 때쯤 되면, 그 이상의 창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를 욕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적들과 비판들이 발생한다. 이를 고깝게 받아들여 마음이 뒤틀린다면 그건 배우는 자로서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개나 돌같은 것들로부터도 배워야 할 점이 있다. 하물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받는 지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설사 어떤 사람의 지적이 틀렸다고 해도, 그와의  대화속에서 얻어가는 건 분명 나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할 것이다.

나는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 한다. 상대방이 작정하고 상처를 주려고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막상 당하면 마음이 저릿해 온다. 어릴 때부터 늘 비판 혹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겁내 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건 반드시 나아게 다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욕을 하지 않게 됐고, 상대방에게 짜증이나 신경질을 내는 대신 스스로 삭히는 편을 택했다. 그쪽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일상 생활에서야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된다고 하지만, 전문적인 일에 있어서, 혹은 일상성을 벗어난 대화에서 그런 상황이 닥쳤을 경우 여간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받아 들여야 하는 비난과 비판을 쓰지 않게 삼킬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관건은 그 과정을 얼마나 슬기롭게, 또 현명하게 넘기느냐의 문제다. 얼마나 더 생산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며, ‘反’ 이 아닌 ‘克’ 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예전에 내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요동사> 를 내시고 혹독한 비판에 시달리신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정말 잘 몰랐지만, 같은 학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논문이나 학회등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절차를 통해 학문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대상을 상대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언론의 인터뷰까지 모두 거절하실 정도로 대중을 상대로 한 설득작업을 완전히 포기하셨는데,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으셨을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차마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대중을 상대로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논리 구조가 다르니 서로 일방통행만을 거듭할 뿐이다. 결국 나중에 책을 쓴다 해도 결코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은 쓰지 않겠다고 그 당시 어린 나이에 다짐했더랬다.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어느선까지 감내하고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지금도 지도 교수님께 한차례 지적을 받고 나면 얼굴이 시뻘개져서 하루종일 마음앓이를 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이 많을 수록 내려놓기가 더 힘들어 진다. 조금 더 가벼워 지고 조금 더 차가워져야 겠다.

2 thoughts on “배움의 상처

  1. 타고나기를 좀 더 담대하게 타고 난 사람들도 있지만
    그게 아닌 사람들은 그냥 빡세게 당하면서 얼굴이 두꺼워지는것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는것 같아요 -_-

    • 휴 전 마음이 너무 물러 터져서 걱정이예요. 조금 더 강해져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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