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거 아니었어.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개인적 시간과 공간은 소중하다. 나는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여행이나 캠프처럼 며칠동안 꼬박 남들과 붙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 끝나면 거의 탈진할 정도로 피곤해 한다. 정신적으로 남들과 장시간 함께 있는 것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최소한 방문을 닫는 형식으로라도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매시간 매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단지 하루에 단 한시간이라도, 아니 30분이라도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완전히 relaxed 된 상태에서 지내야 에너지를 보충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

나는 이런 나의 성향이 일반적인 사회 생활에서 충분히 존중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 아닐 것이다. 하루에 몇시간만 그냥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된다. 미국 문화와 나의 이런 성향은 꽤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어서, 한국보다 살기 편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가끔 일부 한국 유학생들의 오지랍에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들은 내 삶에서 티끌만도 못한 부분이니까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공간적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운 사이지만 가족만큼 천성적인 유대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관계, 예를 들어 연인 사이의 경우에는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 연인간에는 서로에 대한 ‘기대감’ 이 일반적인 관계보다 상대적으로 유난히 크다. 사람에 따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왜 감춰? 나한테 비밀이 어딨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할말이 없다. 비밀이 아니라 그냥 개인의 사생활일 뿐이다. 사생활을 연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까발려야 하는 건 아니다. 바람을 피운다거나,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냥 나는 나만의 소소한 생활이 있고 그걸 혼자 즐기고 싶을 뿐인데, 연인이라고 해서 나의 모든 걸 함께 해야 한다거나 굳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있냐고 따지면 나는 정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가치관의 충돌이고, 맞지 않는 거다. 헤어져야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 교수님과 미팅을 했다. 내가 쓰는 논문에 관한 거라 어제 새벽 늦게까지 준비해서 간 자리였고, 그래서 꽤 오랜 시간동안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나니 몸이 급 피곤해져 왔다. 그런데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아 비를 맞고 싶지 않아 학교에 저녁 늦게까지 남아 있게 됐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집에 와서 늦은 저녁으로 라면을 먹으니 몸이 노곤해져 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농구경기를 틀어 놓은 뒤 정말 wasting time 을 하기 위해 인터넷 여기 저기를 들락날락거렸다. 교수님과 대화가 잘 풀리지 않았고 (그러니까 내 논문 진행과정에서 심대한 문제점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어서 딱히 저녁 시간에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을 돌아 다니다 보니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만화가 다운로드 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다. 일본 만화였는데 아주 유치하고 약간은 야한, 시간을 때우기엔 딱 좋은 그런 만화여서 바로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다. 그때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K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냥 놀러 왔다. 살짝 당황했지만 연락 하지 않고 왔다고 해서 문전박대할 사이도 아니고 오늘 하루 종일 인사도 제대로 못한 터라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어 줬다. K는 눈치가 좋아서 사람 표정을 잘 읽는 편인데, 당황한 내 행동거지를 읽었는지 컴퓨터쪽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뭐 다운받는데?”

라고 물었을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을 틀어 모니터를 가렸는데, 그게 K 의 눈에는 더더욱 의심스럽게 보였나 보다.

“야한거 받는구나? 크크크”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래 만약 실제로 야한 동영상 따위를 다운받는다고 치자. 하지만 그걸 발견한 후 대놓고 놀리면..

그 이후 K 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티비만 계속 봤다. 결국 K 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한시간동안 말없이 휴대폰만 가지고 놀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 갔다. 뭐가 잘못됐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만약 물어봤다고 해도 수치스러운 나머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나간 후 편지를 쓸까 생각도 했는데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나를 두번 죽이는 일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 글을 보고 있을테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이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심지어 자식과 부모간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함께 자라온 형제간에도 지켜야 할 규범들이 있다. 그리고 가까운 사이일 수록 더 조심스러워 해야 할 부분이 존재하기도 한다.

K는 습관적으로 내 안으로 파고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내 사생활을 가끔 파괴한다. 나는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이 혼자 무엇을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내 자신만큼 흥미로운 존재는 없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늘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을. 그는 “말해도 상관없는 거면 왜 말하지 않는거지?” 라고 생각하고, 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은 것이 존재하고 그걸 말하는 순간 사생활은 무너진다” 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점이다.

6 thoughts on “야한거 아니었어.

  1. 결혼하면 ‘나’의 사생활 보다는 ‘우리’의 사생활이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침실하나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서로 간의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 저도 요즘같아선 빨리 정착하고 싶어요. 아싸리 마음 편하게 모든 걸 오픈해 놓고 사는 삶을 살고 싶어요. 어것 저것 눈치볼 필요 없이요.

  2. 음 사람마다 다른것 같아요.. 2년간 같이 살면서 한번도 ‘사생활이 침해받는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냥 제가 뭘 하던 냅 두는 (그다지 간섭하지 않고 그냥 정말 내버려두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요는, 어떤 사람들은 바운더리를 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안다는 것. 그런 wavelength가 맞는 사람이 꼭 생길거에요.

    • 전 제 개인적 공간을 지키는 것에 꽤나 민감한 편이어서요, 사소한 부분에서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때가 가끔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뭔가 아다리(?) 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받고 싶네요 ㅋ

  3. K님이 자꾸 파고드는거는 종혁님에게 관심이 있고 더 알고 싶어서 그런게 아닐까요. 종혁님은 자꾸 물어보고 캐물어야 말을 하지 안그러면 아무것도 안 알켜줄 사람 같아서요. 자기는 궁금해서 그러는건데 또 종혁님은 그걸 부담스러워하니 둘다 섭섭한 상황이 계속 일어나는 악순환이겠지요.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더이다. 양쪽의 양보가 필요할것 같군요. 자, 그럼 3주후에 보지요. ^^

    • 아주 사소한 문제였어요. 문제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의… 하지만 그 사소한 것에서 그냥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발견했을 뿐이죠. 아쉬움도 없고 안타까움도 없어요. 그냥 그렇구나, 하는 점을 확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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