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 주말, 음악 일기.

이번 주말이 할로윈이다. 나는 할로윈에 딱히 특별한 걸 하는 편은 아니다. 미국에 있는 내 고등학교 동창들을 보면 참 화끈하게 잘 놀던데, 나는 nerdy phd graduate students 들과 함께 있다 보니 딱히 코스튬을 입거나 그러고 놀진 않는다. 그저 주말에 다함께 모여 거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정도.

오늘은 우크라이나 출신 친구 M 이 함께 노는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녀의 우크라이나 친구 커플과 오래전 우리 학과를 졸업한 선배 한명도 동참. 정통 러시아식의 저녁을 성대하게 얻어 먹고 러시아 보드카 (앱솔루트 보드카 따위가 아니라 진짜 러시아 보드카였다 ㅜㅜ) 를 잔뜩 마시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 왔다.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 드는 궁금증이 하나 있다. 가만히 보면 얘네는 술을 잘 권하지 않는다. 잔을 돌리지도 않고 다 마셨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강권하지도 않는다. 근데 나한테만 그런다! 내 술잔은 꼭 확인하고 반잔만 마시면 막 뭐라고 하고 벌컥 벌컥 마시면 그렇게 좋아한다. 한국에 와보지도 않은 애들이 어째서 그런 나쁜 한국문화는 잘 알고 있고 또 그걸 한국사람인 나한테만 강요하는 걸까? 미스테리한 일이다. 얘네들도 친한 사이들끼리는 예의고 뭐고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유독 나한테만 심하다. ㅜㅜ

그래서, 요는 오랜만에 독한 술을 계속 받아 마시다 보니 알딸딸한 기분도 들고 머리도 띵하고 아프다는 거다.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어서 빨리 슬럼프를 회복해서 다시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 역시 사람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게 최고다. 누구나 게으르고 싶고 누구나 방탕해 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하면 별로 남는 게 없다. 당장은 즐겁겠지만, 그런 게으르고 방탕한 삶이 내게 가져다 주는 행복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금 당장 약간은 더 피곤해도 원래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제 시간에 정확히 처리하는 것, 그게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 같다.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그래서 내일은 컬리지 풋볼을 보지 않고 아침 일찍 학교로 가야 겠다. 시험 채점도 하고 리서치도 그렇게 보내야지.

다락방님이 보내 주신 가을방학을 요새 매일 듣고 있다. 아침해쌀님도 이들의 노래를 추천해 주셨다. 요새 좋은 한국 음악 참 많이 나온다. 별의별 쓰레기같은 음악도 많이 나오지만, 그건 뭐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마찬가지니까. 다만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음악을 찾아서 들어줬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weiv 필진들이 거론하는 한국판 ‘어덜트 컨템프로리’ 음악 – 예컨데 이적이나 유희열로 대표되는 – 도 물론 좋지만, 2,30대들이 진짜 좋아할 만한 음악은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애피톤 프로젝트, 언니네 이발관, 계피나 한희정같은 뮤지션들이 아닐까. 이들이 계속 마이너한 입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다. 이들의 음악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김동률이나 이적으로 대표되는 메이저 어덜트 컨템프로리 계열 뮤지션들보다는 – 상대적으로 – 훨씬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음악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게 현재 내 생각이다.

오늘 저녁 식사를 끝내고 술을 먹으면서 스매슁 펌킨스 얘기가 나왔다. Ace of Base 얘기가 나와서 한참을 떠들다가 N 이 테크노 음악을 틀었고 씨디가 다 돌아가자 다른 씨디 하나 골라보라고 하길래 언뜻 보니 스매슁 펌킨스 3집이 보였다. 맞다, 그 분홍색 파란색 달님이 울고 있는 두장의 씨디. 모두들 그당시, 그러니까 90년대 중후반을 관통하는 시대에 음악을 들었던 이들이라 스매슁 펌킨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Tonight, tonight” 이 뮤직비디오가 공식적으로 사망하기 전 나온 마지막 걸작 뮤직비디오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다들 빌리 코건의 몰락에 애도를 표했고. ㅋ. (진까 그양반은 왜 그렇게 망가졌을까) N은 “Zero” 를, S 는 “tonight tonight” 을, 나는 “1979” 를 가장 좋아하는 그들의 곡으로 뽑았다. 하지만 “Bullet with the butterfly wings” 가 나오자 모두들 “아냐 사실 이 곡이 최고야” 라고 수정하기도 ㅋ 그렇게 추억을 가지고 재밌게 놀았다.

대학교 시절 최고의 뮤지션이 누구였냐는 질문에 S 는 Strokes 를, 나는 Radiohead 를 꼽았다. 나의 대답은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는 E 의 동의와 술에 취해 “라디오헤드는 너무 청승맞아!” 라고 맞받아친 약 두어명의 nerds 의 반대를 이끌어 냈다.

나는 M 의 집으로 가는 길,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애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 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가사를 외우기 위해 애썼다. 자동차를 팔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자동차 안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그 자유를 빼앗기기 싫어서다. +_+

내 술버릇은 별 거 없다. 술이 많이 올라오면 말이 없어지고 땅을 쳐다 본다.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선 몹시 우울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닥 크게 우울해 지는 건 없고, 그저 혼자 생각에 잠길 뿐이다. 오늘은 술자리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만약 타이밍과 기타 여건들이 참 잘 맞았다면 저 사람과 꼭 사귀어 보고 싶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가끔 나타난다. 그 사람이 여자던 남자던 (그러니까 앞서 말한 ‘여건’ 에는 성별도 들어간다는 거다) 아 왜 이제야 나타나서 그저 안타까운 느낌만 들게 하는거니! 하고 따지고 싶기도 하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고. 몇년전까지 연애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을 일렬로 줄세워 놓고 심사숙고를 한 뒤에 그중 한명을 선택하는 정적인 과정이 아니다. 공간과 시간의 침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연과 우발적인 사건들에 의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결정됐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 감정이란 게 다 그런게 아니겠다 싶다. 내가 욕망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게 인생이었다면 그것처럼 시시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일기를 쓰는 와중에 술이 조금씩 깨고 있다. 보드카와 꼬냑과 맥주가 뒤섞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10 thoughts on “할로윈 주말, 음악 일기.

  1. 어제 오랜만에 홍대를 여유있게 걸어다녔는데 할로윈이라고 온갖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포링거(..) 청년들이 많더라구요. 그냥 걷는것만으로도 할로윈 파티를 즐긴 기분. 크크.
    저도 1979에 한 표를! 근데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루리드의 perfect day도 생각나요 : )

    • 여기도 장난 아니네요. 오늘이 정식 할로윈데이라고 하는데 다큰 어른들도 참 많이들 코스튬 입고 다니는 것 같아요 ㅋ 전 다른 서양 문화보다 할로윈 문화에 더 정이 잘 안가요. 왜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루리드 아저씨 노래는 언제나 심금을 울리죠 ㅠㅠ

  2. 종혁씨 미국가기 한달전인가, 그때 우리가 만났었잖아요.
    되게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갈 사람인데 왜 만났을까, 이런거랑 이제 곧 간다니 슬프다, 하는 뭐 그런거랑.
    이렇게 괜찮은사람인데 좀 더 일찍 만나도 좋았을 걸, 이런거랑.

    그런데 그렇게 멀리가도, 멀리에 있어도, 우리는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쵸?
    :)

    (어째 손발 오글오글 댓글)

    • 그 당시엔 저도 심정적으로 많이 복잡했죠.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되도록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보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혹은 다른 이유로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한번씩은 다 보고 가고 싶었어요.

      제가 대인관계에 좀 많이 무심한 편이예요. 평소에 지인들이랑 연락도 잘 안하구요. 관계 유지 자체를 굉장히 피곤해 하거든요. 그러니까 연락이 자주 닿지 않아도, 어떻게 사는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거나 그런건 아니니까, 혹여나 그렇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3. ㅋㅋㅋ. 마시라고 하면 싫다 안하고 계속 넙죽넙죽 받아 마시니까 계속 시키는거죠. 암튼, 위에서도 많이 들으셨지만, 음주운전은 제발… 아시죠?

    • 끄응. 저 되게 잘 튕기거든요. 비싼 남자인데.. 한번 마시면 되게 좋아하게 만드는 그런 스타일? 그래서 더 보채는 걸지도.. ㅋ 음주운전 안할게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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