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커피 | 너의 이름

비로소2
비로소 커피(Biroso Coffee)는 대흥역 4번 출구로 나와 철길 공원을 따라 걸으면 보이는 갈색 건물의 1층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터리 커피숍이다. 메뉴는 단촐하다. ‘너의 이름’, ‘오감도’, ‘여운’ 등 커피숍이 제공하는 블렌드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에서, 싱글오리진 커피는 필터드립으로 내린 커피에서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차 몇 가지와 디저트 몇 가지를 더한게 메뉴의 전부다. 커피숍의 외관부터 메뉴, 인테리어까지 한결같이 단정하게 꾸며진 이 곳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어느날 저녁, 근처 을밀대에서 평양냉면과 수육을 먹은 뒤 이 곳으로 건너와 프로포즈를 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결혼해 달라는 청을 멋있게 하지도 못했지만, 당시 우리와 사장님 외에는 아무도 없던 조용한 분위기 덕분이었는지(당시는 지금처럼 2층까지 확장하지 않은, 1층에 로스팅 기계와 카운터, 몇 개의 좌석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꽤나 성공적이었던 평양냉면 맛집 여행덕분이었는지, 아내의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일은 무사히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날씨가 좋은 날, 혹은 평양냉면을 먹는 날, 혹은 그냥 기분이 좋은 날, 혹은 그냥 아무 날, 비로소 커피를 찾았다. 금호동으로 신혼집을 정한 탓에 전과 같이 마포구로 자주 놀러 나오지는 못했지만, 서강대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날에는 거의 빼놓지 않고 비로소 커피에 들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갔다. 최근 대전으로 삶의 본거지를 옮긴 후부터는 비로소 커피를 찾는 일이 조금 더 힘들어졌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늘 비로소 커피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합쳐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을 공유한 공간이다. 지금도 프로포즈 당시 비로소 커피 안에 흐르던 공기의 냄새를 코 끝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장님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로스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내는 프로포즈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려 주었고, 나는 프로포즈 기회만을 엿보며 보름 넘게 가방에 숨기고 다닌 반지를 드디어 주인에게 돌려 준 후 홀가분한 마음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비로소 커피 1층은 무척 조용했다. 마치 세상에 우리 셋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하얀 벽이 그런 기분을 더더욱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 여행 사진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거짓말처럼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비로소 커피는 대전으로 내려온 후에도 나의 삶을 한번 더 구원해주었다. 대전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비로소 커피에서 제공하는 블렌드 중 하나를 온라인으로 주문해버렸다. 커피가 도착한 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급하게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좁은 공간이 금세 좋은 커피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약한 심장 탓에 저녁에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지만 그 날 저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처음 한모금을 마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꽤 오랜 시간동안 좋은 커피를 마시지 못하던 중이었다. 입 안에 상큼한 과일향이 퍼져나갔다. 참 많이 고마웠다. 그 블렌드의 이름은 ‘너의 이름’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마신 약배전 커피 중 가장 맛있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래서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가장 좋은 커피였다.

비로소1

데이빗 레이치 | 데드풀 2

데드풀2
[데드풀]을 보지 않았다. 마블 시리즈도 거의 챙겨보지 않았다. [데드풀 2]를 보기 전 유심히 들여다본 작품이라면 바로 직전에 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비행기 안에서 본 [앤트맨]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드풀 2]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다스럽다. 영화와 직, 간접적으로 얽힌 많은 문화적 코드를 안주 삼아 신나게 씹어댄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엄청 딥-하지는 않다. 나처럼 마블 시리즈를 거의 보지 않았지만 대중문화코드에 적당히 노출된 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 이 영화는 ‘제 4의 벽’을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다. 구글링을 해보면 원작의 설정에서 데드풀은 자신이 카툰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임을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카툰 밖으로 나와 작가들의 세계(현실)를 침범하는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각종 문화코드를 먹잇감처럼 잘근잘근 씹어대는 데드풀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관객과 대화하며 ‘이제부터 사람을 많이 죽일텐데 이건 다 오락이고 뻥이야’라고 미리 알려주는 친절한 캐릭터라니. 좋은 시도라고 느꼈다. 둘째, 단순히 선정적인 표현만이 난무하는 성인을 위한 오락영화라고 하기에는 [데드풀 2]가 가진 정치적인 균형감각이 매우 뛰어나보였다. 다인종-동성애자 커플을 주요 조연으로 배치한 점이나 대안가족의 형성을 영화의 큰 테마로 설정한 점, 뚱뚱하고 못생긴 소년을 안티-히어로 역할로 배치하여 전통적인 히어로물의 프로토타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점 등은 이 영화가 가진 절묘한 정치적 감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쉴새 없이 튀어나오는 거의 모든 대사에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건 계산이라기 보다는 감각, 혹은 자세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나 싶다. 작가들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창동 | 버닝

이창동 버닝
결론부터 말하면, [버닝]은 이창동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될만한 가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한국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이창동은 완전히 다른 레벨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한, 이창동이 차기 작품에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서들을 꽤 많이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버닝]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여 [버닝]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혹은, 그 진실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이 영화를 ‘현 시대 젊은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으로 해석한다면 이 상투성은 더 크게 다가온다. 현실은 지옥이고 전쟁인데, 이창동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한채 현학적으로 현실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하는 것은 ‘선’을 제대로 긋는 것이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확하고도 올곧은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닝]에서도 그가 가진 시선은 옳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파주와 반포 사이 어딘가에 줄세워져 있을 것이고, 파주의 젊은이가 가진 응축된 분노와 반포의 젊은이가 가진 책임감 없는 쾌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창동의 [버닝]에서는 현실의 차가운 촉감을 느낄 수 없다. 매혹적인 장면들과 구조주의적인 대사, 잔뜩 꼬아버린 서사구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가 되긴 했다(후술할 것이다). ‘존재’에 대해 묻지 않고 ‘부재’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날카롭다. 하지만 어른인 그가 청춘의 비틀거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어설프고 동떨어져 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지옥도 안에서 함께 숨쉬고자 하는 연대의식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에 천착한 나머지 메시지를 다듬는 일에 조금 소홀하지 않았나 느껴질 정도다.

둘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오히려 퇴보했다. [오아시스], [밀양], [시]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성을 향한 서늘하고도 뜨거운 양가적인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이 벗기고, 대상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다. 아름다운 석양 아래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이창동이 이번에는 여성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담아내려고 작정했구나, 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해미'(전종서 扮)로 대표되는 주요 여성 캐릭터 자체가 [버닝]이 가진 미스테리하고 다차원적인 서사구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해석하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해미만큼 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도 없는 셈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의 여러 의도 중 하나가 이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의 공존에 있다면, ‘모든 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라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 관객에게는 해미의 역할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실재하는 여성의 벗겨진 모습을 대상화하는 주인공에게 요즘 젊은층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영화는 조금 비겁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종수의 극단적인 선택은 그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혹은 그가 대표하는 사회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을 묘사하는 쪽에 가깝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온당하고 합당한가. 혹은, 어른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최선이 그것이었는가. 나는 조금 더 담대하고 조금 더 따뜻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다. 차라리 조금 덜 허무하게 인생을 이어나가는 쪽이었다면 납득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이끄는 하나의 결론에 종수가 사로잡혀가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강제적이지도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한 서사구조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왜 하필 그것이 종수의 선택이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버닝]이 여전히 동시대 모든 한국영화, 더 나아가 꽤 많은 전세계 영화들과 비교하여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영화가 가진 다층적인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지적으로 즐겁고 흥미롭다. 영화는 종수(유아인 扮)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모든 씬 중 종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장면은 거의 마지막 즈음 딱 한 번 등장한다. 벤(연상엽 扮)이 화장실에서 화장도구를 꺼내 여성을 화장해주는 장면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종수가 바라보는 모습이 모두 다 실재하는 현실인지, 혹은 중간 중간 잠들었던 그가 꿈에서 깬 이후부터 전개되는 현실인지, 혹은 그 꿈에서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의 종반부에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열심히 타이핑하는 그 소설의 내용이 그냥 이 영화 자체인지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관객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 해석해도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영화의 형식과 그 형식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가 하나의 주제의식을 형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상징물과 촘촘히 직조된 대사들을 끼워맞추는 행위는 그래서 재미를 넘어 관객 스스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형상화시키는 하나의 의식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만 제거한다면,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립품질을 자랑한다. 결국 나는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쨌든, [오아시스]에서부터 차근 차근 쌓아온 이창동의 ‘환상과 현실 간 모호한 경계’의 영화적 실현이 [버닝]에 이르러 미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둘째, 종수, 벤, 해미로 대표되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는 이 시대의 사회상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종수나 벤, 해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영화 내내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창동은 살아있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 캐릭터들을 철저하게 사회 그 자체로 설계하고 표현하려고 의도한 듯 보인다. 종수라는 인물이 품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이 있다. 벤도 그러하고, 해미도 그러…할까? 아무튼, 최소한 종수와 벤의 대립 관계에서 관객은 파주와 반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벤이 종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실을 환기한다. 최근에 등장한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이정도로 담대한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진실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뼈아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멈춘 느낌이다)

셋째, 영화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모든 씬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허세가 약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영원히 끝지 않기를 바랐던 유일한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창동답지 않게 멋을 잔뜩 부렸다. 그런데 완성도가 꽤나 훌륭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몇 번이고 또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해미의 춤 장면이 대표적인 그런 장면일 것이고, 남산타워(혹은 서울타워)를 바라보는 해미의 옥탑방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묵직한 한 방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창동의 전작들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영화적인 장치들이 [버닝]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의 다음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영화를 직조하는 능력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시각적, 혹은 미학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능력도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그릇안에 무엇을 담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담겨 나올지 궁금하다.

김용완 | 챔피언

챔피언
영화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1%의 독창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영화가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반영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얼굴에서 조금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이 영화는 ‘대안 가족’을 평범하게 그린다.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밝은 결말이 대안가족의 ‘완성’이 되어버리게 만들어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무서운(?) 부분이다. 개그소재마저 어디선가 베껴온 듯한 진부함의 연속에서 주인공이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 몹시 자연스럽다. 주인공의 배경은 이 영화가 반영하는 한국사회의 또다른 어두운 부분이다. 주인공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달동네에 거주하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비주류 스포츠의 최강자로 발돋움한다는 설정을 통해 영화는 한국사회가 가진 모든 비주류 정서를 한 사람 안에 무식하게 뭉뚱그려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두번째 무서운(?) 부분이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소수로 차별받는 모든 소재를 끌어다가 가장 주류 영화다운 방식으로 만든, 욕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정서를 가진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더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귀여운 남매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마동석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역할, 그로 인해 탄생한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한다. 권율과 한예리도 딱 주류 영화의 평균적인 조연이 해야 할 부분까지만 무난하게 해낸다. 배우들의 연기가 딱히 훌륭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불가사의한 영화다.

Julien Baker | Turn Out the Lights

줄리엔 베이커
오직 ‘감정’ 하나로 자신의 음악에 승부를 보려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예술가로서 쌓아올린 자아의 내면을 가감없이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예술 세계를 완성시키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몹시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의 온도와 모양이 청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성 역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감정으로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이 대중음악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그 감정의 전달(delivery)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의 젊은 여성 싱어송라이터 줄리엔 베이커(Julien Baker)가 작은 음반사 6131에서 데뷔 음반 [Sprained Ankle]을 내놓았을 때 많은 이들이 흥분을 하고 상찬을 보낸 것은 그녀가 고백하는 감정의 조각들이 진실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감정이 청자에게 전달되는 과정 역시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타도어(Matador)에 픽업되어 발매한 두번째 음반 [Turn Out the Lights]은 더 큰 기대와 함께 ‘혹시나’하는 걱정을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새음반에서 그녀가 전달하는 울림의 폭은 더 커졌다. 드럼과 베이스같은 리듬파트 악기를 거세한 상태에서 오직 기타와 피아노에 의지해서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음악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후렴구는 코러스와 중첩되어 더 두꺼워졌고, 강하게 내지르는 부분도 더 많아졌다. 떨림은 더 심해졌다. 세심해졌다기 보다는 그 낙폭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절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이 복수의 곡들에서 스쳐 지나간다. 흡사 플릿 폭시스의 후렴구를 듣는 듯한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많이 느껴진다. 다만, 전작에 존재했던 본이베어와 같은 나른하고 나긋한 자기반성적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전달방식은 여전히 훌륭하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어 함께 음반 커버와 비슷한 색깔의 어두운 보라색의 심연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절실하고 또 여전히 갈구한다. 그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절실함을 청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축복받은 음악적 재능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레코딩 환경에서 명민하게 ‘요령’을 공부한 부지런함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새소년 | 여름깃

새소년 여름깃
수퍼루키 새소년의 첫 EP [여름깃]이 내뿜는 진짜 힘은 라이브 무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아직 이들의 ‘소문난 잔치’를 직접 구경해보지는 못했지만, 온스테이지처럼 녹음이 잘 된 라이브 무대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레벨은 영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라이브가 스튜디오 음반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을 가진 대부분의 그룹이 가진 공통점은 연주력이 무척 탄탄하다는 점이다. 음악적 기본기가 뛰어나면 공연의 흐름을 다른 요인들에 빼앗길 확률이 적어진다. 새소년은 이제 막 데뷔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롱런할 수 있는 밴드 음악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놀랍다.

이번 EP에는 사이키델릭 음악부터 슈게이징, 블루스까지 다채로운 장르가 새소년만이 가지고 있는 바탕 위에 잘 버무려져 있다. 그 독특한 정체성은 아마도 확실히 밴드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황소윤 개인이 가진 아우라에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접한 거의 모든 음악들 중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확실히 최근 등장한 여성 기타리스트 중 가장 맛깔나게 기타를 치는 분이 아닐까 싶다. 세인트 빈센트처럼 진보적이진 않아도, 미츠키처럼 장르 속에 파묻혀 제멋대로 퍼져나가진 않아도, 본인들의 음악을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확실한 화장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역시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장르에 대한 이해, 좋은 음악이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훅’에 대한 이해, 과잉과 부족 사이에 존재하는 균형점에 대한 이해 등,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잘 알려진 “긴 꿈”을 비롯해 타이틀곡 “여름깃”, 이들을 록큰롤 아이돌로 만들기에 충분한 섹시한 노래 “파도”, 그리고 EP를 마무리짓는 밴드 이름과 동일한 곡 “새소년”까지 버릴 노래가 하나도 없다.

대전에서 약배전 커피 마시기

2월말 대전으로 내려온 이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 중 하나는 ‘좋은 로컬 로스터리 커피숍’을 찾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두달동안 대전의 좋다는 커피숍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나이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로컬’에 집착한 나머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일상에서 즐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대전이라는 ‘지방’에서 살기로 작정한 이상, ‘서울’에서 문화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며칠전 블랙워터포트에서 주문한 비로소커피의 약배전 블렌드인 ‘너의 이름’이 오늘 오후 도착했고, 바로 학교 기숙사로 가지고 들어가 서울에서 챙겨온 도구들을 이용해 급하게 한 잔을 내렸다. 푸어 오버로 내린 그 한 잔의 커피는, 대전의 수많은 커피숍에서 마신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었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 고생(과 돈낭비)을 했지, 라는 자책감과 5월 1일 로스팅했다는 낙인을 보며 신선한 원두를 빠르게 보내준 비로소커피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했다.

톨드어스토리, 곰에스프레소, 비터앤스위트, 싱크커피로스터스, 커피살림팩토리, 커피인터뷰같은 대전의 유명한 로컬 로스터리에서 대표 메뉴라고 내놓는 커피는 대부분 중, 강배전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원두의 신선함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는지 강배전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다크초콜렛 풍미나 묵직한 바디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기분 나쁜 쓴 맛과 짠 맛이 가득할 뿐이었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오일리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연남동의 리이슈 커피를 제외하면 서울의 핫한 커피숍들이 대부분 원두 본연의 과일향 풍미를 극대화시킨 약배전 커피를 주로 내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일방향으로 진행되는 트렌드의 전파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체현상인지, 대전 로컬숍들의 완고함에 기인한 이 지역 특유의 풍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듁스커피나 프릳츠에서 원두를 제공받는 앤아워페이스나 몇몇커피 등 젊은 감성의 커피숍에서 제공하는 커피는 신맛이 지나치게 강해서 입안이 얼얼할 정도였다. 입안의 감각이 상처받을 정도로 산미를 강조한 커피는 다시 찾고 싶지 않다. 신선하지 않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주는 불쾌한 느낌과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동안 정말 많은 대전 로컬 커피숍을 다녔고, 로컬숍을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최대한 전향적인 자세에서 커피의 맛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완벽한 실패였다. 그 어떤 커피숍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은 커피’라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하고 나올 정도였다. 한 잔의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받는 수많은 감정적인 위로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절망스럽게도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듁스, 프릳츠, 리브레, 테일러와 같은 유명한 서울의 로스터리숍들이 온라인 유통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트나 비로소 등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도 블랙워터포트 플랫폼을 통해 신선한 원두를 온라인으로 공급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커피의 원두를 오늘 받아들고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대전에서 좋은 산미를 느끼는 일은 힘들다.

Rival Consoles | Persona

rival consoles
아방가르드한 전자음악은 시대를 막론하고 일단 ‘듣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것 같다.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 가진 보편적인 문법을 극단적으로 거스르려는 시도는 아티스트에게는 어려운 도전이 되겠지만, 결과물이 성공적일 경우 청자에게는 기분좋은 충격과 함께 ‘귀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이 될 수 있다. 크라프트베르크(Fraftwerk)나 초기 디페쉬 모드(Depeche Mode)의 지적인 실험들이 많은 뮤지션들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대중음악의 영역을 한차원 넓히는 소중한 자산으로 오랫동안 그 역할을 다했던 것처럼, 최근에는 막스 리히터(Max Richter)나 닐스 프람(Nils Frahm)처럼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함께 아우르는 시도가 주목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흥미롭게 이들의 작업들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잉글랜드 출신 전자음악가 라이벌 콘솔스(Rival Consoles, 본명은 Ryan Lee West)의 다섯번째 정규음반 [Persona] 역시 이러한 아방가르드 전자음악의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음반은 특이하게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감독이 1966년 발표했던 동명의 영화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줄거리만  대충 살펴봐도 엄청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말을 잃어버린 한 여자와 그녀를 보살피던 다른 여자의 인격이 서서히 겹쳐지는 심리 스릴러물이라고 하는데 벌써 거장의 향기(?)가 느껴진다)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음반을 깊게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낀 라이벌 콘솔스의 음악은 다분히 해체적이고 효과적이다. 박자와 박자 사이를 해체하고 음과 음 사이를 분해하여 새롭게 배치하는 구조주의적 자세를 견지함과 동시에, 그렇게 재배치된 소리들이 마치 음향효과처럼 청자의 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려는 작곡가의 자세가 함께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자신을 보살피던 여자를 ‘관찰’한다는 사실을 그녀를 보살피던 여자가 알아차린 뒤 분노한다는 영화의 줄거리처럼, 라이벌 콘솔스는 소리의 재구성을 통해 보편적인 대중음악이 청자에게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효과와 조금 다른 차원의 효과를 청자와의 교감을 통해 이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가끔 음악이라기 보다는 음향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특수한 목적을 가진 음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점들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라이벌 콘솔스의 [Persona]는 최근 들었던 모든 음반들 중 가장 놀라운 집중력과 농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음반의 첫곡 “Unfolding”부터 놀라움을 선사하는데, 이 놀라움은 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처음 느꼈을 때의 ‘촉감’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노래가 전개되는 내내 단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 노래 자체의 완벽함에 대한 감탄일 수도 있다. 음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준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4/4박자에 질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일반적인 대중음악이 가진 기승전결이나 훅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나의 경우에는 이 음반을 무척 즐겁게 들었다. “thrilled,” 혹은 “joyfully tensioned”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Kacey Musgraves | Golden Hour

musgraves
정통 컨트리음악 장르에서 안정적인 성공가도를 달려오던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Kacey Musgraves)의 커리어에서 2015년 발표한 음반 [Pageant Material]은 하나의 큰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대중적인 성공과 평단으로부터의 지지를 동시에 이끌어낸 이 음반을 통해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의 음악세계를 컨트리라는 하나의 장르 안에서 정의내리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이 음반에서 그녀는 조금씩, 급하지 않게 컨트리 음악이 아닌 다른 언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위와 같은 시도를 조금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음반이 최근 발매된 [Golden Hour]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에서 그녀는 보다 적극적으로 고유의 음악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심지어 R&B와 디스코 등 흑인음악의 문법 위에서 만들어진 노래도 있다. 쟁글거리는 통기타와 단조롭게 이어지는 박자 등 전통적인 컨트리 음악을 들을 때 연상되는 사운드는 거의 느껴지지 않고, 대부분의 노래에서 끈적거리며 밀고 당기는 리듬과 매혹적으로 울려퍼지는 신디사이저가 주도하고 있다. 사실 백인들의 음악인 컨트리에서 흑인음악적 요소를 차용하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음반이 특별히 더 아름답다고 느낀 이유는 머스그레이브스의 시도가 결코 급진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음악세계가 전이되고 확장되는 과정이 무척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오래 전부터 쭉 듣던 그런 스타일의 노래라고 느끼며 감사하다 보면 사실 완전히 새로운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식이다. 그리고 이 사려깊음은 철저하게 머스그레이브스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감싸는 포근한 사운드, 그 위에 뿌려지는 결정적인 훅들의 조화로움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음악을 워낙 잘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당위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Happy & Sad”인데, 전형적인 보컬팝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안에서의 변화가 무쌍하고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도 매혹적이다. 가사도 전에 없이 감정적이고 감각적이다. 뮤직비디오로 만들어진 노래는 보다 대표적인 머스그레이브스 스타일의 노래인 “Space Cowboy”와 컨트리 범주 안에서 이해 가능한 “Butterflies”인데, 이 음반이 시도하고 있는 확장성을 생각해보면 싱글커트곡의 선정이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앤써니 루소, 조 루소|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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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스크린의 80% 이상을 독점했다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우리 부부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대전에서의 완전한 정착을 아직 이루지 못한 우리는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극장에서 보낼 때가 늘었는데, [레이디버드]까지 보고 난 직후 대전의 거의 모든 스크린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쓸어담아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이 영화를 보도록 강요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관련 영화 중 그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마블에서 발간한 그래픽 노블 중 그 어떤 것도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본 미국식 히어로물 그래픽 노블이라면 배트맨 관련 몇 권과 [왓치맨]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나를 만나기 전의 아내(짧게 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아내의 영화 취향은 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가 그나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해 상대적으로 익숙하다는 점 정도였다.

아무튼, 마블의 세계관에 대해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것이 전부인 나같은 사람도 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유일한 장점이다. 아 하나 더 있구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어야 할 수퍼스타들이 씬 몇 개에만 등장하는 조연으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래서)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한 점, 돈 치들, 폴 베타니, 마크 러팔로같은 좋은 배우들이 철저히 계산된 ‘money-making’ 대사들만 꼭두각시처럼 내뱉는 모습을 영화 내내 지켜봐야 하는 점, 조쉬 브롤린과 브래들리 쿠퍼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 점, 그 외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올랐던 374가지의 불만들은 모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블의 히어로들과 세계관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알겠고 이 프로젝트가 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같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볼 이유가 거의 없어보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출연진들이 살짝 보여주는 키치한 세계에서 조금 위로받은 것을 빼면 이 영화가 가진 유머감각도, 서스펜스도, 서사도, 연기도, 연출도, 그래픽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