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좌파의 현실과 한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장관 청문회 문제로 뉴스판이 떠들썩하다. 후보자를 둘러싼 여러가지 의혹들과 그 해명을 지켜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후보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공무원으로서의 업무 적합성 등이 청문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질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분위기는 전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듯 보인다. 후보자로서 하자가 있는지 여부가 정쟁의 중심에 있는 모양인데, 그 하자라는 것조차 법적인 기준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정서”와 같은 모호한 개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논쟁의 차원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후보자는 오래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 정권을 옹호해 왔다는 점에서 유시민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유시민이 제도권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느끼고 직접 노무현을 돕기 위해 직접선거를 거쳐 국회를 통해 정치판에 뛰어든 것과는 달리, 조국은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 위에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해외 사업자 기반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여 목소리를 높이다 선출직 공무원으로 이 ‘판’에 들어왔기에 그 결이 꽤 명확히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즉,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회적 위치는 두 인물이 서로 공유하는 지점일지 모르나, 정치판의 거물로 성장하기 까지 지나온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나는 그 성장과정이 조국을 유시민과 구분짓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이 조국과 조국을 지명한 현 정권이 현재 어려움을 겪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조국과 같은 성장배경과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을 ‘강남좌파’라 부른다. 재단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뛰어난 학업능력을 바탕으로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일찌감치 획득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는, 이 ‘강남’이라는 요소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뻔한 성공담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상위계급의 이너서클 안에 갇혀 우경화하지 않고 하위계층을 위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낸 ‘좌파’ 이미지가 합쳐질 경우 대중에게 꽤 신선한 매력을 선사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가진 인물이 소셜미디어에서 스타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개인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서 아직 의미가 있다면, 조국이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그를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의 성취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즉 기득권층에 야합하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꽤 쿨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며 충분히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평생 학계에만 있어 국가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전무한 그가 선출직 공무원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온라인에 형성된 그에 대한 강한 지지와 믿음이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전문성보다는 그의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더 강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타이틀은 공직자로서의 전문성을 최소한으로 담보하는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 이렇게까지 거물이 된 배경의 한편에는 검찰을 필두로 한 현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부와 검찰이 신뢰를 잃는 현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데, 조국은 어느 순간부터 많은 대중이 ‘개혁’하기를 바라는 검찰의 반대편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교수 시절 실제로 검찰개혁 등에 대해 꽤 많은 목소리를 내어 왔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민정수석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마냥 맹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청문회에서 조국의 ‘하자’가 공격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향한 대중의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온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발견될 수록, 그리고 그가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자녀에게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증여하려한 정황이 포착될수록, 결국 그 역시 ‘좌파’라는 이미지 안에 감추어진 ‘강남’으로서의 속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렇고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실망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후보자의 해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 실제 불법으로 드러난 것은 현재까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후보자측이 청문회에서 불법성 여부를 중심으로 방어하기 시작한다면 패착이 될 확률이 높다. 대중은 그가 여전히 다른 ‘강남’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고, 이는 다분히 감정적이며 정치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황교안 역시 법무부장관 후보자 시절 청문회를 거쳤다. 그도 ‘강남’이었고, 부동산 투기부터 고액 변호사 수임료 문제까지 불편한 과거가 꽤 여럿 드러났음에도 장관직에 임명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국민 모두가 그를 노골적인 ‘강남’으로만 생각했지, 그에게 약자를 향한 애정이라던가 소수자를 위한 법재정 의지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속한 세상에서 자유로웠다. 조국은 다르다. 그는 사회적 올바름, 정의의 공평한 실현, 경제적 평등 추구라는 다른 세계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 특히 그가 되려 하는 법무부장관의 경우 공직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모두에 속해있는 만큼, 후보자의 삶 자체에서 대중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황교안이 뼛속까지 강남우파를 대변하는 꼴통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후보까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면, 조국은 공정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와중에도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을 셀링포인트로 내세울 수 밖에 없는 어려운 포지션을 스스로 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조국의 인생은 남들보다 쉬었으며, 그의 딸 역시 남들보다 쉬운 길을 걸어왔다. 불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깨를 내어 함께 행진하고자 하는 그의 ‘동지’들보다 훨씬 쉬운 길을 기득권 세력이 좋아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편취해왔다면, 그 자체로 조국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이 점이 유시민과 조국을 나누는 경계선이며, 노무현과 문재인이 왜 여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지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좋은 지점일 것이다. 대중이 전처럼 조국에게 그들의 어깨를 내어줄까? 단지 문재인이 지명한 후보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현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그리고 지금까지 현 정부가 펼쳐온 정책들은 어떤 차원 안에서 나름의 최선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정책, 대북정책, 통상정책 등등, 다른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면 분명 이보다 더 못한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정책도 많았고, 오판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결정도 많았다. 하지만 이건 그들이 가진 인간적 한계때문이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거나 특정 기업, 혹은 세력과 결탁하기 위한 목적에서 벌어진 의도된 실패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책적 실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국민은 그 실패를 용납해야 한다. 이명박이나 최순실처럼 개인적 욕심을 위해 나라 정책을 움직이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으나, 단순한 정책 실패 한 두개로는 나라가 망하진 않는다. 현 정권은 그러한 차원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 후보자 문제도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편이다. 법무부장관이 무척 중요한 자리이긴 하지만, 조국이라는 개인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사법정의 전체가 흔들리거나, 혹은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국으로 상징되어 한동안 꽤 트렌디한 브랜드로 이름을 날렸던 ‘강남좌파’라는 특정 사회계층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조 후보자 문제를 현 정권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기보다는, 현 정권의 핵심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이들이 가진 민낯이 과연 어떤 색깔일까,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세종시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서울의 스페셜티 커피 문화는 이제 하나의 산업화 단계로 진화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호황(boom)기에 접어든 한국의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 종사자들의 살림살이는 이와는 상관없이 날로 고달프게 변할 가능성이 높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소규모 스페셜티 로스터리/커피숍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쫓아다니다 보면 숨이 다 찰 지경인데, 이제 한국에도 꽤 널리 퍼져 있는 커피 긱(gig)들도 숨이 차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공급과잉의 기운이 느껴진다. 날로 높아져가는 커피 긱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제 각 로스터리/커피숍은 원산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매주 흥미로운 원두를 가져와 커핑(cupping)을 진행해야 한다. 소수의 커피 전문가들이 행하던 행사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보여주어야 하는 필수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높은 품질을 전제로 하는 스페셜티 커피 산업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결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과당경쟁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커피를 즐기는 모든 이들이 까다롭게 커피 플레이버를 파악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원자재 비용이 높은 산업의 특성상 도심지로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창업자들이 높은 임대료에 시달리게 만든다. 마진율이 높을 수 없으며, 문화의 지속성 역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서울의 주요 스페셜티 커피숍의 수명이 임대기간 단위인 2년보다 월등히 길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서울의 작고 예쁜 커피숍들, 예컨대 성수동의 모멘토 브루어스, 망원동의 퀜치 커피, 신사동의 컨플릭트 스토어같은 가게가 4년 뒤에도 여전히 붐비는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14년 첫번째 전성기를 맞이한 테일러 커피가 이미 한 세대 전의 올드스쿨로 분류되는 이 아찔한 속도감 속에서, 아마 향후 2,3년의 기간 동안 서울의 스페셜티 커피 산업은 첫번째 고비를 맞이할런지도 모른다. 성북구의 리이케(Liike Coffee)나 대흥동 골목으로 숨어들어간 후엘고 커피(Huelgo)와 같은 지역화 전략이 조만간 대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서울 바깥의 모습은 어떨까. 한국의 모든 에너지가 오직 서울의 특정 지역에만 집중된 까닭에 커피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발전양상을 시차를 두고 후행하며, 생/원두의 다양성이나 로스팅 기술, 커피숍 인테리어 등 각 요소들 역시 시차를 두고 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로부터 시작되는 낙수효과, 혹은 파급효과(spill-over effect)의 특성이 강한 것이 이쪽 산업의 모습이다. 대전으로 직장을 옮긴 후 한동안 열심히 커피숍 투어를 다녔다. 이 동네의 커피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서울과 어떤 ‘차이’를 보일지 알고 싶어서였다. 내가 받은 인상은 약간 비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만한 말을 입 밖으로 내어야만 하는 것이 싫지만, 서울과 대전의 스페셜티 커피 산업의 차이는 ‘수준 차이’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커피숍은 생두와 원두의 다양한 맛을 잡아내지 못하고 인테리어에는 정체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객을 배려한 현명한 호스피털리티도 만나보기 힘들다. 다만, 커피숍과 로스터리를 둘러싼 ‘문화’는 질적 수준으로 줄세울 수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서울의 커피 문화를 후행하여 학습하려는 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싶다. 난 아직 대전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이건 평균적인 수준에 대한 이야기이고, 대전에도 눈이 번쩍 띄일만큰 훌륭한 커피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 톨드어스토리가 대표적이고, 최근 새로 문을 열어 방문한 인트라던도 커피맛이 참 좋았다. 앤아워페이스는 매뉴팩트의 원두를 필터드립으로만 제공하는데 커피숍의 분위기부터 커피맛까지 균일한 품질을 자랑한다. 블랙워터포트를 통해 전국으로 원두를 배송하는 임프레션 커피컴퍼니도 빼놓을 수 없다.

세종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세종은 새롭게 만들어진, 어린 도시다. 때문에 이 지역의 역사라던가, 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직 건물만이 지어지고 사람만이 유입되고 있다. 하지만 건물과 사람만 있다면 곧 문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충청도 출신을 기반으로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전구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국가기관과 연구기관이 가장 먼저 들어선 까닭에 수도권에서 신규 유입된 주민들로 인해 전체적인 지적수준이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공급되는 신축 아파트의 여파로 주변 지역에서 값싼 전세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전자를 압도하여 도시 전체의 문화는 대전이나 청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답게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생기가 넘치는 것도 사실이며, 도시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 해보려는 새로운 기운이 곳곳에 퍼져 있다.

세종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그것도 맛있는 커피를 만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종촌동의 알라메다다. 세종시는 새로운 동네가 하나씩 생겨날수록 도시 전체의 중심상권이 이동하는 특징을 지니는데, 종촌동은 도담동, 고운동, 아름동 등과 함께 세종시에서 가장 먼저 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알라메다는 종촌동 중심에 위치한 아주 작은 커피숍이지만,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제공한다. 서울처럼 상큼한 과일향만을 전달하지 않는 중-강배전 로스팅이 특징이다. 세종시에서 ‘커피다운 커피’를 최초로 접한 곳이라 개인적으로 특별하다.

모든 좋은 커피숍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로스팅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에너지 낭비가 될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시에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는 원두로 커피를 제공하는 현명한 커피숍이 꽤 여럿 있는 편이다. 금강을 사이로 남북으로 나뉘는 세종시의 남쪽편에서 가장 훌륭한 커피숍을 이야기할 때 스테이플러(Stapler)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부산의 터줏대감 에프엠(FM) 커피 로스터스의 원두를 사용하며 가끔 게스트빈으로 푸어오버를 제공한다. 훼마(Faema)의 E61을 쓰는데, 서울을 비롯해 전세계의 모든 커피숍 중 가장 맛있는 아메리카노를 이 곳에서 마실 수 있다. 서울산 로스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도 있다. 프릳츠의 원두를 세종에서 만나고 싶다면 정부청사 근처에 있는 카페샘(Saem)에 가면 되고, 리브레의 원두가 그립다면 종촌동에 있는 빵집 로프앤러프(Loaf & Rough)에 가서 커피를 부탁하면 된다. 카페샘은 카페로서는 특이하게 상가건물 고층에 위치해있다. 외부인의 방문과 중,소규모 회의가 잦은 도시의 특성을 고려하여 간단한 회의가 가능한 공간배치가 특징이다. 로프앤러프는 다섯손가락에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적은 테이블을 배치한 작은 공간이다.

세종시에는 심지어 포틀랜드 스페셜티 커피의 터줏대감 코아바(Coava)의 원두를 납품받는 곳도 있다. 교외에 위치한 아크커피(Arc Coffee)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코아바의 특색있는 원두로 무장한 곳이다. 서울처럼 모든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지방에서 커피숍을 운영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차별성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크커피 바로 옆에는 서울에도 매점이 있는 위트러스트 커피가 위치해 있는데, 운이 좋으면 이 곳에서 그 유명한 파나마의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세종시 신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논밭이 펼쳐진다. 교외 지역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창고형 커피숍들로는 한옥을 개조한 클래식, 커다란 창고를 개조한 에브리선데이, 공주가는 길에 위치한 롱디커피 등이 있는데, 커피맛에서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널찍한 공간감, 혹은 인스타용 사진을 원한다면 가볼만 하다. 물론, 좋은 경치를 원한다면 당연히 세종호수공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홀리스커피로 가야 한다.

비록 커피맛은 조금 떨어질 지언정 지역성을 강하게 느끼고 싶다면 중년의 가게주인이 지키고 있는 곳을 가봐야 한다. 국세청 건물이 위치한 새롬동과 한솔동의 경계지점에는 가베예술이라는 조그만 커피숍이 최근 문을 열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이 직접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려주신다.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서울의 뉴웨이브 스페셜티 커피가 아니다. 고전적인 커피잔에 따라내어 커피를 마시는 방법까지 일러주는, 1세대에 가까운 커피숍이다. 강 건너 남쪽에서는 카페공주카페하우프(Howff)에서 비슷한 공기를 접할 수 있는데, 모두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신 중년 이상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서울의 트렌디한 산미에 질렸다면 이 곳에서 중후한 옛날 느낌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

한 도시에서 가장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 스타벅스라면, 그 도시의 다양성과 지역성은 실패한 것일까? 한국에서는 굳이 그렇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서울의 중심가를 제외한다면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방문객의 ‘기대’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부응하는 커피숍은 여전히 스타벅스다. 개인적으로 이 브랜드 특유의 강배전 커피를 굉장히 싫어한다. 커피의 쓴 맛만을 남긴 스타벅스의 강배전은 이제 더이상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곳에 가면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좋은 배경음악과 훌륭한 소음처리, 친절한 호스피털리티(왜 엔제리너스와 홀리스는 이것을 결코 따라할 수 없는 것일까. 세계 8대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리고 콘센트! 커피숍의 존재 목적-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혹은 그 군중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해 우리는 커피숍에 간다-을 따지다 보면 스타벅스가 그 망할 커피맛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피숍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세종도 마찬가지다. 전국 스타벅스 매장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매출을 올린다는 정부청사 근처의 리저브점, 동네 어머니들의 영원한 안식처 종촌점과 새롬점, 그리고 최근에 다정동에 생긴 드라이브 쓰루 지점까지, 세종시의 스타벅스는 시민이 가장 원하는 형태의 커피숍 서비스를 훌륭하게 제공하고 있다.

세종시는 아직 ‘스페셜티 커피’라고 이름 붙일만한 가게가 많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구 30만을 갓 넘긴 신생도시에 많은 것을 바라면 안된다. 아마 위례나 판교를 가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서울에서 차고 넘쳐흘러버린 스페셜티 커피의 맛과 향이 세종시까지 흘러들어오기를 기원해본다. 그래서 세종에 사는 동네 시민들이 쓰레빠를 신고 노트북 하나 덜렁 손에 든 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들어갈 수 있는, 동네 스페셜티 커피숍이 곳곳에 생기기를 바란다. 오늘도 정부청사 스타벅스 리저브에 앉아 일을 하다가 아내에게 농담을 건냈다. 평일 오후, 편한 옷차림(파타고니아), 맥북(프로), 커피숍(공정무역). 볼더의 키워드라고. 세종시도 볼더처럼 느리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좋은 커피와 함께.

구묘진 | 악어 노트

문학도 음악처럼 ‘오버’와 ‘인디’를 구분할 수 있다면, 좋은 ‘인디 문학’ 작품을 만났을 때 쾌감을 꽤 크게 느끼는 편이다. 그 인디 문학작품이 작든 크든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순간도 가끔 일어나는데, 그 때에는 일종의 통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사회의 진화를 추동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과거의 시스템에 구속당하지 않는 창조성이고, 인디 문화는 그러한 긍정적인 에너지의 반동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인디 문학가로서의 개인적인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도 간접적으로나마 잘 알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인디 문학가의 개인적이 삶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가슴 속에는 꽤 깊은 멍자국처럼 먹먹함이 남아있게 된다. 일종의 미안함인 것 같다. 빚을 진 것 같은.

대만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구묘진은 1969년 대만에서 태어나 1995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자살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국립대만대학에 입학하여 대만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문학상까지 수상한 그가 머나먼 타국에서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유를 내가 감히 헤아릴 길은 없겠지만, 남들과 조금 다른 성정체성,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외부세계와의 내적 사투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추측이다. 이른 나이에 생을 거둔 구묘진이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 장편소설 [악어 노트]는 그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으며,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94년에 최초 발표된 이 책은 저자의 죽음과 연계되어 대만 사회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결국 2017년 대만에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이 작품이 알려진 시기도 2017년 즈음이다. 번역가 보니 휴(Bonnie Huie)의 노력으로 미국에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등의 매체의 즉각적인 찬사를 이끌어냈고, 더 펜 번역상 등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두 문단에 걸쳐 구구절절하게 이 책의 배경에 대해 조사한 바를 적은 이유는, “울면서 번역했다”고 말한 영문 번역가 보니 휴, 그리고 “미안하다”고 옮긴이의 말에 적은 한국어 번역가 방철환처럼, 이 책을 읽는 나를 비롯하여 많은 독자들 모두 이 책을 몹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 이유가 위와 같은 시대적 진보와 개인의 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라즈’라고 불리우는 주인공이 적은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대만과 중국어권 사회에서 ‘라즈’는 레즈비언 등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대학교에 막 들어간 첫 학기부터 마지막 학기인 8학기까지의 이야기가 8개의 챕터로 나뉘어 전해지는데, 한마디로 이 책은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자를 사랑하는 본성을 타고난 주인공이 겪는 내적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마음의 병으로 발전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된다. 화자는 멈출 수 없는 불같은 사랑과 그 열병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떠안게 되는 죽음과 가까운 깊이의 절망에 대해 끊이없이 이야기하며, 화자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주인공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인물들이 당면한 죽음으로 가는 이 비극적 길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존재할 뿐, 이 길을 걷는 것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애자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것인데, 주인공 라즈 역시 사랑에 실패한 후 남자를 억지로 만나 ‘여성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일 뿐 본질적인 처방전은 아니며,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구실만 제공할 뿐이다. 당시 구묘진이 느꼈던 대만사회의 폐쇄성이 책의 곳곳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유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읽히는 이 책은 구묘진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전해진다. 구묘진이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몽마르트 유서]와 함께 퀴어 문학에 있어 컬트적인 작품으로 남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전자음악을 하는 키라라가 한 시상식에서 “더이상 친구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한 발언은 그 이후 지금까지 내 마음에 부채처럼 남아있다. 그들이 외부의 차별과 내부의 갈등을 동시에 상대하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키라라같은 이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까지, 나는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이성애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개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Jake Xerxes Fussell | Out of Sight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를 배경으로 활동 중인 포크 음악가 제이크 설서스 퍼셀(Jake Xerxes Fussell)이 2015년 지역 음반사(Paradise of Bachelor)를 통해 발매한 동명의 첫번째 정규음반을 무척 좋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뒤이은 2017년작([What in the Natural World])은 건너 뛰었고, 2년 주기로 올해 발표한 세번째 음반 [Out of Sight]에서 그의 음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퍼셀의 음악은 아메리카나 포크, 혹은 미국 남부 전통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니, “뿌리를 두고 있다”기 보다는 미국 남부음악의 정체성을 온 몸에 뒤집어 쓰고 있는 형국이다. 그의 아버지는 민속학자이자 사진가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더햄에서 태어난 퍼셀은 여느 고고학자/인류학자/민속학자의 가족이 그러하듯 아버지의 탐구활동을 따라 미 알라바마부터 조지아까지 남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다. 아버지가 기록으로 남긴 미국 남부의 다양한 생활상은 퍼셀 음악의 원천이 되었다. 피치포크는 이러한 퍼셀의 음악적 자양분을 문제삼아 그의 음악이 “진짜배기(authentic)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베이루트(Beirut)가 이미 그런 비판의 차원을 넘어선 집시-어메리카나 음악을 선보이듯, 미 남부지역에서 평생을 보낸 퍼셀이 젊은 나이에 관찰을 통해 남부 포크음악을 형상화했다는 이유로 정체성 비판을 하는 것은 동의받기 힘든 부분이 있다. 아무튼, 퍼셀의 음악적 동반자는 기타리스트 윌리엄 타일러(William Tyler)라 할 수 있는데, 현재 퍼셀 음악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은 명상적이고 실험적인 슬라이드 기타 사운드(라이 쿠더의 음악이 떠오른다)를 함께 완성했다.

[Out of Sight]는 미 남부의 전통을 아름답게 묘사한 음반이다. 노래의 제목으로 남부지역의 고유한 지명(“The River St.Johns”, “Winnsboro Cotton Mill Blues”)을 따오거나 남부지역 특유의 여유롭고 낙천적인 생활상을 담아낸 노래를 부르거나(“Drinking of the Wine”), 혹은 블루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Winnsboro Cotton Mill Blues”) 부분에서 음반의 특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음반에는 총 아홉 곡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음반을 여는 “The River St.Johns”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어깨에 힘이 들어간 곡인데, 청자를 긴장시키며 음반으로 불러들인다. 이 음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퍼셀의 목소리가 주인공, 혹은 간판스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낮은 톤의 푸근한 목소리는 바이올린, 만돌린, 기타, 드럼 등 포크음악의 주요 요소들과 어울리며 하나로 통일된 목가적 심상을 음반 전체에 걸쳐 형상화하는데 이용된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연주곡(“Oh Captain”)도 존재한다. 이렇듯 음반의 초반부는 이러한 심상을 구조화하는데 사용되며, 점층적으로 쌓아올려진 분위기는 “The Rainbow Willow”에서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3분 30초를 넘지 않는 노래가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7분이 넘는 시간을 자랑하는 이 노래는 퍼셀 특유의 목가적인 아메리카나 음악을 강렬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히 음반의 백미라고 칭할 만 하다.

퍼셀의 음악적 파트너 윌리엄 타일러는 한 인터뷰에서 “셀틱 포크(영국 포크음악)나 델타 블루스와 차별화되는 포크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남부군 깃발(Confederate Flag)이 휘날리는 을씨년스러운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지역 특유의 낭만도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그 어떤 지역보다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산다. 경쟁, 유행 등 도시적인 공격성에 쫓기며 살지 않아도 된다. 따사로운 햇살과 눈물이 날 정도로 맑은 공기가 함께 한다. 퍼셀의 음악은 남부의 좋은 점을 음악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Kate Tempest | The Book of Traps and Lessons

새로운 음악을 소개받는 몇몇 소스 중 가장 선호하는 매체 중 하나인 NPR의 [All Songs Considered] 팟캐스트를 통해 케이트 템페스트(Kate Tempest)의 세번째 음반 중 선공개된 “FIresmoke”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이었는데, 저녁 늦게 퇴근해 막 학교를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당시 이 노래를 듣고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는데, 잠시 차를 세워둘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팟캐스트 진행자인 밥 보일린은 1년에 약 500회(!) 정도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노래를 소개하며 무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공연”으로 케이트 템페스트의 SXSW 공연을 꼽았다. 이후 나는 한동안 이 노래만 들었다. 이 노래만 들으며 새 음반이 어서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먼저 발표된 두 장의 음반은 모두 머큐리 음악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전력이 있다. 발표한 모든 정규작이 그 해 영국에서 발매된 대중음악 음반 중 그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어마어마한 레쥬메를 가진 그녀가 발표한 세번째 음반 [The Book of Traps and Lessons]는 템페스트 커리어 최초로 미국인 프로듀서 릭 루빈(Rick Rubin)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다. 릭 루빈이 누구던가. 데프잼(Def Jam) 음반사를 차리고 비스티 보이스나 런 디엠씨의 음반을 제작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기묘한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다.

케이트 템페스트의 이름을 검색하면 많은 매체들이 그녀를 어떻게 분류할지 엄청난 고민을 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선 그녀의 음악을 힙합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첫번째 음반 [Everybody Down]은 상당히 전형적인 힙합 음반이었으므로 그들의 범주화가 틀렸다고 하긴 힘들다. 그녀를 ‘spoken words’ 쪽으로 분류하는 매체도 많다. 두번째 음반 [Let them East Chaos]에서 ‘배경음악’의 형식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랩으로 볼지, 낭송으로 볼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내뱉는 문장, 혹은 이야기들이 대단히 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그녀를 시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바람직해보인다. 실제로 그녀는 음반 뿐 아니라 책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인간관계의 단절과 고독,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세계의 몰락과 같은 비관적인 인식이 우선 존재한다. 그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청자에게 말을 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잘’ 살아가라고.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템페스트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이토록 잔인한데. 나는 이 ‘잘’에 해당하는 디테일이 템페스트 음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99%의 비관 속에 피어오르는 1%의 희망. 그걸 절묘한 단어의 조합으로 전달하는 음악이 케이트 템페스트다.

[The Book of Traps and Lessons]에서는 힙합비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배경음악을 완전히 배제하고 템페스트의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트랙이 있을 정도다. 올드스쿨 힙합의 대부 릭 루빈과 함께 작업했기에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신서사이저 건반이 템페스트의 가장 든든한 동료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와 신서사이저의 불길한 사운드는 세기말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심지어 음반은 11개의 트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구성되어 있다. 음반 제목처럼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이다. 음반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는 “Firesmoke”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 전까지(이 노래가 음반 전체에서 가장 밝고 긍정적이며 활기찬(..) 트랙이다) 이야기가 쭉 한 호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음반을 듣다보면 어깨가 살짝 경직될 정도다. 빠른 속도로 몰입해 들어가 상당히 깊은 차원까지 내려가는 심리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사집을 보며 더듬더듬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실로 ‘시인’에 가까운 예술가라는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대중음악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한 문장을 경험하는 일도 참 드물다. “Firesmoke”보다 뛰어난 노래를 올해 발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Bedouine | Bird Songs of a Killjoy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디 포크 뮤지션 베두인(Bedouine)의 두번째 정규 음반 [Bird Songs of a Killjoy]는 올 해 여름 가장 즐겨 들은 음반 중 하나다. 만약 당신이 통기타 하나 정도가 단촐한 벗이 되어 중저음의 목소리로 읊조리듯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포크음악을 좋아한다면 베두인의 음악을 도저히 그냥 지나쳐갈 수 없을 것이다. [Bird Songs of a Killjoy]는 마음 넓은 동네 누나가 직접 뜨개질해 선물해준 스웨터같기도 하고, 건조하고 맑은 지역에서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리쬐는 석양 같기도 한 음악을 들려준다. 마음을 고요하게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는 그 어떤 카페인 음료나 진정제보다 효과도 뛰어나고, 금방 중독되어 반복해서 듣게 된다는 점에서 마약 성분도 조금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모든 것을 통달한 관조적인 시선 때문은 아니다. 베두인 역시 이 음반에서 닿지 않는 사랑에 애달파 하고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자신의 얼굴을 보아달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들끓는 마음이야 보통의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정서겠지만, 이 음반은 위와 같은 마음 속 소란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조용한 용기와 감추거나 꾸미지 않고 (역시) 가만히 드러내보이는 침착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시리아에서 태어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온 아즈니브 코르케지안(Azniv Korkezian)은 성인이 되어 LA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사운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영화의 음악 및 음향을 편집하는 일을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본인의 사운드를 만져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7년 우연한 기회를 통해 프로듀서 거스 세이퍼트(Gus Seyffert)를 만나 데모 테잎을 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작된 30곡 중 열 곡을 추려 베두인의 이름으로 발매된 동명 데뷔 음반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그 다음부터는 익히 들어 익숙해진 인디 뮤지션의 성공담. 평단으로부터의 호평과 동료 뮤지션들의 적극적인 구애 속에 두번째 음반은 순조롭게 제작되어 결국 머나먼 극동아시아의 한 청자에게까지 무사히 전달되었다는 이야기. 시리아 출신 뮤지션의 음악은 처음 들어보는데 특정 국가의 색깔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인 정서를 포크의 형식 안에 잘 녹여내고 있다.

[Bird Songs of a Killjoy]는 사실 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은 음반이다. 만듦새가 떨어진다거나 러닝타임이 짧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아주 단순명료하고 솔직하게 좋은 음반이기 때문이다. 41분 정도의 러닝타임에 담긴 12곡은 거의 동등한 수준의 단단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으며, 이 중 꽤 죽이는 훅을 가진 노래도 꽤 많은 편이다. 나는 “One More Time”과 “Bird”, “Bird Gone Wild”를 가장 좋아하지만 다른 청자는 음반의 다른 부분을 더 좋아할 수 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측면을 사랑할 수 있는 개방성,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계속 귀를 잡아 당겨 듣게 만드는 품질의 일관성, ‘도저히 이 부분만은 듣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음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버리는 사람이 아마도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보편성까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좋은 음반이 가진 대부분의 요소를 가진 음반이다.

오기가미 나오코 | 요시노 이발관

여기 이상한 마을이 하나 있다. 익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이 마을에 사는 모든 미성년 남자아이는 하나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마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발관에서 동일한 스타일의 머리모양으로 깎아야만 하는 이유는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때문이다. 전통인지 강압인지 알 수 없는 이 마을의 관습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모든 어른들은 합심하여 아이들의 머리모양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는데, 도쿄에서 전학 온 도시소년 한명이 여기에 반기를 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카메모 식당], [안경] 등 잔잔한 영화를 만든 오기가미 나오코의 2004년작 [요시노 이발관]은 단순하고 소박한 시놉시스에서 시작하여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으로 마무리짓는다. 두발의 자유화를 부르짓는 소년은 곧 몇명의 동지를 구하지만, 이 어린 소년들이 오랜 마을의 전통을 지키려는 어른들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과정은 쉽지 않다. 논리나 이유는 없다. 감정적인 설득도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어른들만 있을 뿐이다. 어른들의 강압적인 태도 뒤에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 목적이 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아이들이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머리모양을 하기 위해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아름답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섬뜩한 이데올로기 간 충돌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통제 기제가 머리모양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인지 영화는 마냥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머리 모양을 제멋대로 바꾼 아이들은 결국 강제로 머리를 짧게 깎이게 되지만, 여전히 평화롭게 어른들과 공존하며 조금은 나아진 머리모양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동안 조심스럽게 쌓아온 서사구조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결국 ‘타협’이 결론인건가? 적당히 굴복하되(혹은 굴복당하는 현실을 인정하되) 상존하는 시스템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쪽을 택해라는 것인가? [안경]에서 꽤 그럴듯한 멋진 마무리를 선사했던 감독은 [요시노 이발관]에서는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 ‘화합’이나 ‘이해’ 같은 것을 이끌어내고 싶었다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게으르고 건방지다. 조금 더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는 장면들이 많다. 열린 결말로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몫을 남겨두기에는 모든 이야기가 명확한 마침표를 가지고 있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도 많지 않다. 이래저래 답답한 결말이다.

오테사 모시페그 | 아일린

영화 [캐롤]을 무척 좋게 봤다. 영화는 유려한 영상미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영화음악,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의 폭발적인 연기력 등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데, 이 요소들이 설득력을 얻는 데에는 영화속 두 주인공이 직면해야 하는 시대상과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 가난한 하위계층 여성과 부유하지만 사회적 구조에 구속당한 상류층 여성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을 때의 황홀감과 절망감은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마음 속에 남아 때때로 되새김질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하이스미스의 작품까지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작품 뿐 아니라 퀴어 문학 전반에 걸쳐 파트너 간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는 서사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어 왔다.

젊은 여성작가 오테사 모시페그의 2016년작 [아일린]은 여러 측면에서 [캐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하위계층 여성이 상류층 여성을 만나 갖게 되는 가슴뛰는 설레임을 세밀하게 포착해내었다는 직접적인 공통분모 외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의 묘사에 집중하는 기본적인 작품의 골격 및 바탕색에서 [캐롤]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만 [캐롤]처럼 서글프게 아름답진 않다. 서늘하고 불편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인공 아일린은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라 비뚤어진 자아를 가진 불우한 젊은 여성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인공 여성의 마음 속에서 나오지 않은채 그 속을 끈질기게 탐구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직장생활에 시달리지만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작은 마을을 탈출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현실에서 과감히 빠져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큰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계기가 리베카라는 상류층(으로 보이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리베카는 아일린이 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그려진다. 아일린은 리베카에게 홀딱 빠지고, 결국 자신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진전되는 가운데 뜻 밖의 마을 탈출 기회를 얻게 된다.

늙은 주인공 아일린이 과거의 상황을 회고하며 그 내면에 집중하는 서술방식은 자연스럽게 서스펜스-스릴러적 장치를 갖게 만든다. 소설의 서두에 주인공이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마을을 떠난다는 결말을 미리 공개한 뒤 어떻게 그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지 한꺼풀씩 드러내는 구조는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 중 하나다. 하지만 정작 그 서스펜스적인 요소는 많이 지루하고 따분한 편이고(대체 언제 일이 벌어지는거야!),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이라고 한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주인공 아일린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수만가지 일그러진 생각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식의 묘사로 명성을 떨친 포크너의 작품만큼이나 극단적이진 않다.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빠져들 수 밖에 없게끔 밀고 당기는 쫀득한 문장들이 이 소설이 가진 또다른 매력인데, 아마도 이 점을 인정 받아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흥미롭지만 지루하고, 명쾌하지만 진부했다. 충분히 잘 쓴 작품이고 모시페그만의 선명한 문체와 서사 스타일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지만 이 작가의 팬이 되기에는 확 와닿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이상근 | 엑시트

에어컨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곡식이 익고 자연이 순환하기 위해서는 찌는 듯한 더운 계절도 필요하기에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지만, 습도에 약한 체질 탓에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집을 탈출하여 에어컨을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는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동네 영화관이었다. 영화관 역시 우리 부부처럼 별 생각 없이 극장에 와서 적당히 몇시간 때우고 갈 심산으로 올 사람들을 위한 영화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고른건 [엑시트]였다.

[엑시트]는 재난 영화의 기본 구조에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적당히 버무리되, 배우들을 혹사시키고 강약을 조절하는 법 없이 우직하게 신경쇠약 직전의 극단만을 강조하는 한국영화의 특수성도 함께 섞여 버린, 평범한 한국영화 그 자체다. 취업준비생 남자주인공과 성차별에 노출된 노동자 여성이 대학시절 갈고닦은 등산기술을 바탕으로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하고 본인들의 삶도 능동적으로 개척한다는 줄거리는 ‘새로운 것은 전혀 없지만 결재선에 있는 임원 그 누구도 심하게 태클 걸지 않을 것 같은’ 전형적인 모범생 한국영화 시나리오다. 재난이라는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서사에 불안한 청춘의 삶을 녹여낸다는 발상은 이와 아무런 개연성이 없는 재난의 원인과 그보다 더 어이없는 재난의 거시적 해결과정때문에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한채 사그라든다. 중간에 탈출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삽입한 장면은 노골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노린 것 같은데, 이것도 결과적으로 희화화시켜버리는 감이 없지 않아 ‘세월호 마케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 하다. 임윤아의 연기는 ‘연기 못한다’라는 평을 듣지 않기 위한 아이돌 출신 연기자가 억지로 망가지려는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튀게 느껴져 영화를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조정석의 대사는 잘 들리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어차피 대사를 귀기울여 들을 필요도 없었다. 고함을 치거나 울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배우들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질주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고, 소리치게 만들고, 배우들의 고운 얼굴에 검댕이칠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디렉팅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감정과잉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렇게 힘든걸까. 한번 면전에 대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영화에서 딱 하나 볼만했던 장면은 조정석의 클라이밍 씬이었는데, 이건 마일드한 고소공포증 환자인 내가 공포영화적인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겟아웃]보다 더 스릴 넘치게 지켜봤다. 그냥 단순히 고소공포증 때문이었다.

“아직 꿈 꾸는 것 같아요”

‘시간강사’라고 불리우는 직업이 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통해 사회적인 관심도가 높아졌고, 이 직업을 가진 사람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온 뒤 “강사법”으로 불리우는(정식 명칭은 “고등교육법 개정안”이다) 법안이 발의되어 올 여름부터 실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의 핵심은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여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자는 것인데, 실제 이 법을 운영해야 하는 대학본부부터 이 법안의 수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강사들까지 반대하고 있는, 헛점이 상당히 많은 법안이다.

딱딱한 법안 이야기는 짧게 하고 싶다. 2010년 한 시간강사가 세상을 등진 뒤 2011년 처음 발의된 법이 8년동안 유예된 끝에 누더기가 되어 시행된 것부터가 문제였다. 실제로 이들의 삶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사립대는 안정적인 강사채용에 들어가는 비용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임교원에게 대형강의를 맡기거나 엉뚱한 강의를 묶어 한 명의 강사에게 몰아주는 등 편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개인사업자로 등록한 사람에 한해 강사 대신 겸임교원 등의 자리를 제안해 4대보험 등 정식교원으로서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최대한 주지 않으려 한다. 재정적 어려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립대는 기존에 채용하던 강사들의 자리를 그대로 보전해주는 선에서 행정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려 한다. 전임교원 채용과정과 같이 공개채용 및 심사위원회 구성을 거치도록 법으로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결국 주먹구구식으로 알음알음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법은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이 강사법의 경우 그렇게 될 확률이 상당히 높아보인다.

아버지는 시간강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당신 제자들이 졸업 후 정규직을 구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 아예 제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 밑에서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젊은이들에게 졸업 후 강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조언을 한 뒤 그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아버지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박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지방의 한 사립대에 전임교원으로 임용이 되었고, 나 역시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강사경험 없이 지금의 학교에 전임교원으로 바로 오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부자는 강사 생활을 삶 속에 체화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뿐 아니라 나 역시 강사생활이 “사람이 할 짓이 아닐” 정도로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이유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 직업이 얼마나 끔찍한지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올 여름 내내 학교의 교원 채용 과정에 이리저리 불려다녀야 했다. 순순히 말도 잘 듣고 그럴듯한 감투도 있으니 여러모로 써먹기 좋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학교의 민낯, 혹은 내부 속사정을 가감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높은 분들의 결정에 논리를 만들어 드리거나 얼굴마담으로 참석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부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을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올 여름이 특별히 더 힘들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빙교원과 시간강사 등 학교 내에 존재하는 많은 비정규직, 계약직 교원을 내 손으로 뽑아야 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듯 사람을 뽑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고 힘들다. 채용 분야, 채용 대상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그 누구도 크게 손해보지 않게 그림을 만드는 와중에 미래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하고, 학과의 발전과도 연계시켜야 한다. 상당히 어려운 고차방정식을 푸는 문제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한 뒤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나의 결정과 책임이다. 모든이가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상황에서(불만은 토해내고 이익은 나누기 바라지만 책임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춘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종합한 뒤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결정된 자리가, 즉 시간강사와 초빙교원 자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원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쉽지 않은 일인데, 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자리를 득한 사람이 앞으로 감내해야 할 고달픈 삶의 과정을 ‘제안’한다는 것 역시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짱구를 굴려 최선의 해결책을 마련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견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했다. 얼마 되지 않는 작은 파이를 한번 더 잘게 쪼개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이 내 해결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인데, 사과 껍질과도 같은 보잘 것 없는 혜택을 받게 된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교수님, 그럼 저 혹시 통과된 것인가요? 확정이 된 것인가요? 아직 꿈 꾸는 것 같아요.”

이 문자를 받은 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내 마음에 무겁게 남아 있다. 이 문자가 가끔은 나를 무너뜨리고, 가끔은 나를 다시 일으켜세운다. 버티기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로 고달픈 직업을, 다른 누군가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이 얼마나 더 엿같이 변할지 감도 잡을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 지원자가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얼마나 괜찮은 박사 논문을 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지원자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상대할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은 걱정이 전혀 되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들이 그에 합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현상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으로 스며들어 마치 그 사회적 지위가 복에 겨운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문제다. 점점 그런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물론 그 누구도 이 지원자에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이들에게 왜 국가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개인의 선택과 책임 문제가 아니다. 비용/편인 분석과 같은 경제논리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최소한의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받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이 그리 크게 잘못된 생각인가 싶다. 학생 입장에서는 똑같은 “교수님”인 모든 교원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정도의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대학 곳간을 바닥내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말 맞는 주장인가 싶다. 교육은 빈곤을 탈출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에 교육의 사회적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그 교육을 최전선에서 수행하는 교육자의 지위 역시 마찬가지다. 인적자원 하나로 버텨 나가야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졸속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니며, 행정가들의 편의에 맞게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대학 시절 수많은 “교수님”을 만났다. 그 중 누군가는 총장이나 장관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고 얼굴에서도 반질반질 빛이 났다. 그 중 다른 누군가는 늘 허름한 차림에 어두운 표정으로 강의실에 들어왔다. 항상 입는 옷이 같았고, 학생식당에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다. 학생들도 대부분 그 “교수님”들의 사정을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저 사람 강사라며, 학과장이 싫어해서 곧 짤릴거래, 저 교수님은 청와대에서 곧 부를거래, 저 교수님 이혼했대, 등등. 나는 대학 시절 운이 좋아 참 좋은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 중 시간강사의 강의도 많았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펀치라인’이 몇 있을 정도다. 강의가 너무 좋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학기가 끝난 뒤 따로 식사자리를 청했던 분도 강사였고, 철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나를 도서관으로 보내버린 사람도 강사였다. 선형대수학과 미적분학 수업도 강사들에게 들었는데, 그들이 가르쳐준 공식과 기술은 지금까지도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나를 가르쳤던 그 강사분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그들의 사정을 모른 척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알게 되어 버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책임지고 있는 몇 안되는 시간강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손에 돈을 더 쥐어드릴 수는 없겠지만, 교원으로서의 자긍심, 권위, 보람, 이런 낭만적인 단어들만이라도 우스워보이지 않도록, 거친 세상에 훼손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예를 갖추고 싶다. 그들이 나와 함께 학생들을 위해 일하는 동등한 동료이고, 함께 고민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동지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 요즘같은 세상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런 낭만적인 것들 뿐이니까, 그것들만이라도 온전하게 가져가게 하고 싶다.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게 되어 버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