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 Iver | i,i

네번째 정규음반 [i,i]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보니베어(Bon Iver), 혹은 저스틴 버논(Justin Vernon)의 음악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세 장의 음반은 어쩌면 매우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수준에서의 ‘드러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첫번째 음반 [For Emma, Forever Ago]는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인디-포크 음반이었기 때문이다. 300명 정도 규모의 볼더의 폭스 극장(Fox Theatre)에서 단촐한 밴드 구성과 함께 한 버논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단단한 인디음악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가 10년 뒤 전자음악을 할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위스컨신의 작은 숲속에서 나와 빅밴드와 함께 만든 [Bon Iver]는 –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 확장되기 시작한 그의 음악세계가 내딛는 또다른 첫걸음이었는데, 역시 그 자체로 매우 좋은 음반이었고, 당시 우리는 그의 새계가 ‘완성’되었다고 ‘착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만명 규모의 레드락 야외극장(Red Rocks Amphitheatre)에서 저스틴 버논은 확실히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포크음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레벨로 나아갔지만, 어쨌든 여전히 인디의 범주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칸예 웨스트 등과의 콜라보레이션을 거쳐 그의 세계가 한번 더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3집 [22, a Million]이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소리는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가사는 알아듣기 힘들었으며, 실험적인 전자음악의 빈번한 사용만큼이나 음반커버와 노래제목은은 기호처럼 모호하게 느껴졌다.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4집 [i,i]를 듣고 나서야 그의 세번째 정규음반이 한 극단을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음을 알게 되었다.그는 세 번의 꽤 괜찮은 여행을 마친 후, 비로소 그의 음악세계의 한 절정을 여기 4집에서 풀어놓았다. 물론 지난 세 번의 음악여행 모두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저스틴 버논이라는 희대의 아티스트가 걸어온 길을 기록한 인디-영웅적인 성장담의 한 챕터로 읽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다.

밴드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집부터 스튜디오 작업을 늘 함께 해온 션 케이시(드럼, 키보드)와 매튜 맥커핸(드럼, 베이스)이 이번에도 음반작업에 참여해 보니베어 사운드의 핵심 중 하나인 더블-드러머 시스템을 형성했고, 2집부터 밴드 사운드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은 섹소폰은 3집에 이어 이번에도 마이클 루이스가 연주했다. 또한 이들을 포함해 총 여섯명이 보컬 작업에 참여했다. 스튜디오 작업에 참여한 멤버 구성을 굳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저스틴 버논의 음악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요소 – 겹겹이 쌓인 보컬 층위, 관악기의 사용, 더블-드러머를 동원한 리듬파트의 강조 – 는 2집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3집부터 확연하게 달라진 점으로 많은 이들이 전자음악의 도입과 그로 인해 보니베어의 장르가 달라졌음을 지적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음악에서 포크의 냄새를 맡는다. 여전히 쓸쓸한 위스컨신의 작은 동네 골목이 떠오른다. 보니베어의 장르는 변화하거나 옮겨간 것이 아니라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고, 확장되었다기 보다는 음악적 핵심요소는 그대로 간직한 채 그들만의 장르를 서서히 조립하고 쌓아올려 만들어온 것이라고 판단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오히려 인디포크부터 전자음악까지, 상이한 형식 안에서도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끔 한다는 점이 놀랍다.

개인적으로 꼽는 1집과 2~4집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한다면 상징, 혹은 기호체계의 변화를 들고 싶다. 언제부턴가 그의 가사를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아니, 더이상 그가 가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음악에 많은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고 있지만, 영어의 문장구조 속에서 체계적으로 그 내용을 표현하기 보다는 (난해한) 음반 커버와 (더 난해한) 노래 제목, 그리고 분절적이고 상징적인 기호체계로 구성된 음악구조를 통해 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점에서 오히려 최근의 음악작업 방식이 더 마음에 들고, 조금 더 완성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보니베어의 음악은 확고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비로소 버논의 스토리라인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편협한 장르구분으로는 담을 수 없는 레벨로 올라간 것이다. 비슷한 부류로 묶을 수 있는 아티스트로는 라디오헤드와 뷰욕이 있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그냥 라디오헤드의 음악이고, 이들 외에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할 수 있는 이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뷰욕도 마찬가지다. 이제 보니베어도 그런 아티스트가 됐다. 이제부터는 보니베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 세상이 펼쳐지는 셈이다.

토드 필립스 | 조커

영화 포스터에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더 큼지막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원맨쇼를 유희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는 작은 얼굴 근육 하나부터 전체적인 몸짓의 형상까지 촘촘하게 설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무엇을? 조커의 그것을. [조커]는 피닉스의 연기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조커가 악당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던 가난한 청년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모의 학대로부터 시작된 비극의 크기가 비정한 고담시의 현실과 맞닿아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 이성을 지배하게 되어버린다는 서사구조는 새롭지 않다. 오히려 만화에서 영화로 넘어온 히어로물의 흔한 성장담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서사를 ‘평범한 개인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능력을 깨닫고 특별한 행동을 행하게 되어 대중을 주목을 받게 된다’고 짤막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나, [조커]는 흔한 영웅, 혹은 반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윤리적인 부분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며 만들어진,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영화다.

피닉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를테니, 차라리 짧게 줄이는 편을 택하겠다. 그는 좋은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최고의 연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영화적 연기를 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영화의 구조적 결점을 배우의 에너지를 갈아넣어 메우려는 의도가 느껴져 박수를 아주 세게 쳐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조커를 완벽하게 재창조해냈지만, 그의 조커-아서 플렉 캐릭터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그냥 조커였는데, 매우 뛰어난 연기를 펼쳤을 뿐이다. 대중이 여러 영화로부터 ‘교육’받은 조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혹은 ‘배트맨’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커의 최종적 캐릭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상상하며 만들어진 조커의 초기 모습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며 그다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영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으로 2차원 직선 위에서 진행되는데, 이 영화는 사실상 조커-아서 플렉의 내면의 변화를 다루고 있으므로 조커의 캐릭터 자체가 2차원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누구인가? 만화책의 유명한 캐릭터다. 마블과 DC코믹스가 본격적으로 종이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그 판을 옮긴 후 히어로물 영화는 오히려 더 만화적으로 변했다.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만화책의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화책에서 팬들이 읽었던 장면을 영화속에서 재현해내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영화적인 혁신은 둔화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블의 오랜 팬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겠지만, 그냥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눈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CG로 떡칠된 장면들이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만화책 속 장면의 재현에 그칠 때 힘이 쭉 빠진다. 돈이 또 이렇게 낭비됐구나 싶다. 그 와중에 서사구조는 점점 더 빈약해졌다. 마블영화에서 제대로 된 서사를 보여준 영화는 사실 거의 없다. 그들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든지 10년이 넘었는데 앞서 언급한 ‘평범한 개인이 블라블라~’ 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다크나이트] 시리즈 정도일텐데, 이조차 나는 사람들의 열렬한 숭배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만든 배트맨 시리즈 3편이 썩 괜찮게 만든 오락영화 수준이라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조커는 이런 흐름 위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캐릭터이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악역일텐데, [조커]는 대중이 궁금해하는 그 지점, 히어로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의 탄생비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상업적이고, 충분히 자극적이며, 적당히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와 정말 좋은 배우의 연기만 합쳐지면 박스오피스 1위는 거뜬히 가능하겠다, 싶은 그런 영화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조커]에 대해 비판할 지점은 참으로 많지만, 가장 중요한 딱 하나만 언급해야 한다면 윤리성의 결여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서 사회적 구성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맺어진 윤리적 합의가 영화로 옮겨진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 반영웅으로서 폭도들의 찬양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데, 일반인이 살인자가 되어가는 심리적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조커]가 지난 10여년의 기간동안 대중이 반복적으로 교육받은 히어로물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관객은 그가 자신의 힘을 폭발시키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외부적 요인이 있음을 반복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 결과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게 지나친 비약이라면, ‘영화 모방 범죄’를 구글에서 검색하도록 하자.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전달매체다. 두시간여의 시간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화면을 통해 아서 플렉의 ‘성장담’을 보게 되면 그의 악마성에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서사구조를 만든 감독이 배우의 미친듯한 연기력에 떼를 쓰며 만들어낸 결과가 윤리적으로 아주 얄팍한 영화라면, 마음이 상당히 불쾌해진다. [위플래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영화는 조금 더 많이 비판받아야 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조커 캐릭터를 알뜰살뜰하게 보살피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고, 그 결과 의도와 상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정신병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직장과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핍박받는 와중에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때문에 머릿속 정신병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설정은 얼마나 형편없고 성의없는가.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어가는지였는데, 감독이 던져주는 해답은 ‘부모에게 맞아서’였다. 아서 플렉이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폭력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이벤트는 동료 광대가 건네주는 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왜 동료가 갑자기 총을 건네주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갑자기 총이 생기고 그걸 우연히 마주친 폭력적인 취객에게 사용하며, 여기서부터 숨겨진 광기를 되찾게 되는데.. 글쎄, 이게 최선의 흐름이었나 싶다.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가 고담시의 최고 엘리트인 웨인 가문에 대해 착각-톰 웨인이 아서 플렉의 아버지라는-을 한다는 설정은 내가 지금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이 어이없는 착각이 아서 플렉을 광기로 몰아넣는 또다른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서 플렉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상당히 큰 부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토크쇼 진행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 톰 웨인을 아버지로 믿는 점 등등), 그 부정의 결핍이 악마성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롯이 아서 플렉의 내면에 대한 영화인데, 영화관을 나왔을 때 우리가 조커의 내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정교육이 참 중요하구나, 정도?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빈약한 서사구조와 게으른 윤리성을 배우의 연기와 감각적이 편집,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 등으로 한껏 치장하며 변명하는, 꽤 잘만든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대칭적 사회와 쉬운 분노

세상사는 비대칭적이며 불균등하다. 기회는 균등하지 않게 주어지며, 비록 균등한 기회에서 출발한다 해도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불평등한 결과의 연속이다. 현대 주류 경제학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기력증은 비주류 경제학이나 다른 사회과학 분야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러하다고 변명한다. 자본의 이기적인 속성은 스스로 번식하고 진화하는 능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자본을 갖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만든다. 경제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여기까지다. 평등이 사회정의의 최종 종착지 중 하나라면, 99%의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두 축 중 다른 하나인 민주주의에 이 사회정의의 달성을 베팅할 수 밖에 없는 자포자기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다수에 의한 쉬운 분노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은 다수의 이해 정도에 의해 종종 무시되기 쉬우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성마저 다수결이라는 원칙 아래 용인받기도 한다.

나는 지금 ‘조국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국은 비대칭적인 사회구조에 기여한 사람이다. 그는 겉으로는 평등한 사회정의에 대해 떠들었지만(그리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떠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99%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대물림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의 표리부동함에 분노했다. 평생 노력해도 갖지 못할 가치들이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하나씩 공개될수록 분노의 크기는 커져갔다. 이 분노의 크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생명체가 두 개 있는데, 바로 정치인과 언론인이다. 이들은 대중의 등 뒤에 달라붙어 그들의 분노를 먹고 사는 붙어살이과 생물인데, 그 결과로 정치인은 득표수를, 언론인은 클릭수를 얻으며 행복감을 느낀다. 이 시점부터 서사구조는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광장에 정당인들이 주도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떤 재벌가 자녀의 마약문제는 단신으로 처리되는데 오직 한 장관의 자녀에 대해서는 서류에 붙은 글씨 하나까지 특종으로 보도된다. 아직까지 불법 여부가 확인된 바는 없는데, 갑자기 검찰이라는 특수한 생명체가 달라붙어 사건의 덩치를 키운다. 그들의 미래 먹거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보면 개기는 것이고 다른 이가 보면 할 일을 하는 것인 그들의 특수한 업무는 이 사회를 정확하게 절반으로 갈라놓았다. 한 쪽은 광화문에서, 다른 한 쪽은 서초동 검찰철 앞에 모여 목을 놓아 부르짖는다. 너희가 잘못했다고.

양비론은 아니다. 이 서사의 출발이 조국이라는 괴물을 낳은 비대칭적 사회구조와 다른 모든 중요한 이슈를 제껴두고 오직 조국에 대해서만 분노를 집중하는 쉬운 선택을 한 대중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경화되는 대학생들이 왜 재벌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고 강남 아빠에 대해서만 분노하는가, 생각해볼 부분이다. 강남의 학부모들이 왜 조국을 두둔하고 나서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조국 한명때문에 갑자기 박탈감을 크게 느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서히 침체 일로를 걸어가는 경기상황과 갈수록 빡빡해져가는 스펙놀이가 이들을 꽤 오랜 기간동안 짓눌러왔다.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임계치가 가까워진 시점에 정치세력과 언론인이 그들을 자극했다. 다만 이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고, 그들의 분노가 비록 나이브한 쉬운 선택이었을지언정 거짓과 위선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충분히 화를 낼만한 상황이지만, 누군가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가진자들은 조국으로 인해 자신들의 치부까지 드러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적당히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교육 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취업, 거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이 성행하고 있고, 조국 서사는 그 일부분을 공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국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커질 일은 아니었고, 기왕 화를 낼거면 이 사회의 전체적인 시스템에 대해 감정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조국에 대해 연일 맹렬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한 정당에 속한 많은 이들이 그보다 훨씬 더 한 짓들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이 동등한 수준으로 보도가 된다면 상황은 아주 짜게 식을 것이다. 조국 한 명에게 집중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어떤 특수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이는 여론은 주도하는 이들이 가진 비대칭적인 시각과 그들에 휘둘리는 대중의 쉬운 분노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므로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전고운 | 소공녀

[소공녀]는 관객 입장에서 일종의 테스트처럼 작용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소는 일반적으로 기호식품이라고 알려진 담배와 위스키를 계속 즐기기 위해 거주 목적의 집을 포기한다. 실제로 짐을 챙겨 나와 거리를 떠도는 자발적 홈리스 미소의 선택을 두고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 담배와 위스키 중 하나만 포기해도 되지 않았나”, 혹은 “왜 굳이 가사도우미 일을 고집하려 하나,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 고시원에서라도 잘 수 있을텐데” 등의 의문을 품은채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와 달리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쪽이 있을 것이다. 미소의 행보에 대한 공감의 정도를 통해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적 통념 간 거리를 측정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첫번째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그 어느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해도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전환된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균형적인 시각으로 양쪽의 의견을 고루 청취하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쯤 생각해볼 질문을 던지되 그 답까지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점이 [소공녀]가 가진 또다른 미덕이다. 미소가 잠잘 곳을 청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과거 밴드활동을 함께 했던 멤버들의 집이다. 그들의 ‘집’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물질적인 의미로서의 공간보다는 다사다난한 인간군상이 수집되는 사회활동의 채집 현장처럼 보여진다. 시댁 식구들과 갈등하며 자아를 잃어가는 젊은 여성의 집, 아내와 이혼한 뒤 쓰레기더미 속에서 오직 슬퍼하기만 하는 나약한 남성의 집, 과거의 자신을 감추고 들어간 부유한 가족 앞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꾸며야만 하는 여성의 집 등, 감독은 미소의 시선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견고한 사회적 통념 및 부조리의 틈을 재치있게 파고든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믿으며 호기롭게 집을 포기한 미소의 점점 곤궁해지는 삶이 그려진다. 담배, 위스키와 함께 미소의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남자친구는 현실과 타협하여 미소의 곁을 떠나고, 휴대폰 유지비용과 머리결의 변색 방지를 위해 복용하던 약값마저 떨어지는 상황이 묘사된다. 거주공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극한의 경계선까지 밀려난 그녀는 결국 영화 말미에 자발적이지 않은, 어쩌면 비자발적인 온전한 홈리스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런 그녀의 삶에는 여전히 담배와 위스키가 함께 한다. 선택에는 반드시 상충관계가 존재하며, 그 선택의 대가는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어쩌면 뻔한) 결론에 다가가는 과정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깔끔하다.

[소공녀]에서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을 굳이 꼽자면 주인공 미소 정도가 있을텐데, 영화 속 미소는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이타적이고 현명하며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다만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집이 없을 뿐이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미소보다 많은 면에서 떨어지지만 오직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업신여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 역시 ‘집’이라는 가치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미소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이 갖는 가치만큼이나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구속하지를 미소의 극단적인(?) 예를 통해 깨닫게 된다면, 담배와 위스키가 집보다 결코 덜 소중하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만큼은 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소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중요한 이유는 배우 이솜의 연기 덕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꽤 굵직한 선으로 방점이 찍힐 이 영화에서 이솜은 자신이 가진 신체적 장점을 한껏 뽐내며 꽤 그럴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 외의 연기들은 평범했다. 적당히 평면적이고 적당히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 미소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2010년 이후 서울의 변화가 아니라면 나오지 못했을 작품이다. 현재 서울은 사회구조적인 분화가 몹시 빠른 속도로 발생하고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의 상류층은 부의 축적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고, 서울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조금 더 창의적인 장점을 활용하여 ‘다른’ 생활방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상수와 연남, 이태원, 문래, 혹은 그 어딘가에서 전통적인 자본주의 통념에 기초하는 부의 축적을 거부한채 ‘YOLO’를 추구하는 세대가 점점 그 두께를 두텁게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낀 서민, 혹은 중산층은 (미소의 남자친구처럼) 상류층에 기생하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와중에 서울 곳곳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문화로부터 창출되는 산업의 찌꺼기를 적당히 즐기기도 하며 불안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지방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힘든 계층의 다양한 방향으로의 분화는 [소공녀]가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식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다. 영화의 주요 무대 중 하나로 쓰이는 싱글몰트바 코블러는 김앤장 변호사 빌딩과 서울종로경찰서 바로 옆 좁은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미소는 그곳에서 현금을 내고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벌충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이 젊은 시절 부리는 객기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위스키를 목으로 넘기는 그 순간의 행복은 결코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미소의 그 찰나의 행복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소공녀]는 그 정도의 넉넉함이 관객의 마음 속에 있는지 묻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전적이고 날카롭다.

윤가은 | 우리들

[우리집]을 보고 서둘러 [우리들]을 챙겨보았다. [우리들]과 [우리들]은 연작이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케이션 장소(찾아보니 정릉 일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를 공유하고 [우리들]의 주연 배우들이 [우리집]에서 똑같은 이름을 달고 잠깐씩 모습을 비춘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일한 세계관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우리집]이 무너져가는 가족의 불안함을 몸으로 느끼며 아둥바둥거리는 애어른들의 이야기라면,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완고한 미성년의 자장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 주고받는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으로의 성장을 강요받지 않았다 해서 이들이 맺는 관계성이 미숙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시작부터 파탄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법적인 성년들이 맺는 관계의 일반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겪는 관계의 서투르고 폭력적인 끝맺음을 비껴나가며 오히려 더 완숙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에서 대부분 쉽게 잊혀지거나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한, 우리가 ‘평범’하다고 대충 규정 지어 표현하는 어린 영혼의 섬세하고 소중한 마음을 따뜻하지만 에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된다. 이 영화가 가진 폭발적인 힘은 이 ‘옆에 있어 주는 시선’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 생각났다.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지만 아이가 거칠게 다루어지면 바로 옆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반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아이의 열심한 마음을 바라본다. 감독의 그 시선이 참 좋았다.

반마다 그런 애들이 있었다. 공부는 중하위권, 얼굴도 외모도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이 아니고, 집은 잘 살지 못해 부모의 온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말에 자신의 옷에서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하는, 그런 애들이 있었다. 뭐 하나 특출난 것이 없으며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 이 아이들은 조금 더 영악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의 쉬운 표적이 된다. 때로는 본인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채, 텅빈 주변에 단 한명의 친구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힘이 되어 주었던가. 혹시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어떤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거절하지는 않았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치며 반성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쳐 지나온 ‘기회’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왜 나는 손을 먼저 내밀지 못했던가. 영화의 주인공 선만큼 용기를 내지 못한 내가 미워졌다.

마츠오 코우 |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

나의 첫번째 건담은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였다. 1988년 무렵,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식 수입이 불법이었던 시기, 서점에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캡처하고 대사를 엮어 책으로 만들어 팔던 때였다. 그 이유와 목적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데리고 무궁화호 열차를 타야 했던 어머니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 [역습의 샤아] 캡처본 책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이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미래의 역사를 배우듯, 나와 같은 한국의 아이들은 조악한 화질로 녹화된 [건담] 시리즈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미래의 역사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우주세기연표와 1년전쟁, 아무로 레이와 샤아를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모든 건담시리즈를 챙겨볼 정도로 푹 빠지진 않았지만, 건담 시리즈와 모빌 슈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 중 한 챕터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는 건담의 정사(正史)의 출발점인 1년 전쟁과 그 시간을 공유하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일종의 평행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주세기에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다른 건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약간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군살 없이 단순하되 충분히 흥미롭다. 공격하는 연방군과 지키려는 지온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연일 벌어진다. 프리재즈를 좋아하는 연방군 소속 파일럿 이오 플레밍은 전투와 모빌슈트에 미친 사람이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에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는 상관이자 연인 클로디아와는 달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부적인 싸움꾼이다. 이에 대항하는 지온군의 대릴 로렌츠는 비치 보이스 류의 요트 음악을 좋아하는 스나이퍼로, 전쟁 중 두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채 같은 처지인 상이군인 부대에서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서사와 인물, 컷과 씬은 이 두 명의 주인공이 격돌하는 장면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안에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성공적으로 녹여내며 성인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낸다. 유치한 장면은 하나도 없고 재즈와 올드 팝 음악이 번갈아 나오는 OST 역시 훌륭하며,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은 복합적인 인물 묘사 역시 뛰어난 편이다. 특히 나처럼 1980년대 건담 애니메이션에서 그 기억이 멈추어 있는 사람이라면 최신 애니메이션 기술로 되살아난 건담 대 자쿠의 전투신은 영혼을 빼앗아갈 정도의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현재 연재중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다. 아마도 두 주인공의 운명은 이후 꽤 많이 바뀔 것 같다. 이런 류의 작품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현재 애니메이션 후속편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벤디트 플라워]까지 나와 있다.

윤가은 | 우리집

[벌새]에 이어 [우리집]을 연이어 보았다. 아내는 영화 중간 등장하는 대사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럴까?”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벌새]와 마찬가지로 [우리집] 역시 어린 시절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던 공통된 고통의 기억을 집요하게 일깨운다는 점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밑바탕을 가지고 있다. 바쁜 성인의 삶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이 화면에서 되살아날 때, 관객은 어린 배우들의 얼굴에서 그 고통의 세대 간 되물림을 확인하며 연민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귀여운 에피소드와 어린 배우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며 이 영화의 주제가 안고 있는 무게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겠지만, 후반부로 나아가며 영화는 운명론적 비관성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낸다. 관객은 절망감과 당혹감을 느끼며 어린 소녀들이 보여준 대안적 가족으로서의 연대의식과 전통적 형태의 가족에 대한 희미한 희망만으로 과연 안심을 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한다. 상자, 요리, 저녁식사, 휴대폰 등으로 상징되는 가족 구성원 간 안정적 관계에 대한 소녀들의 열망은 어른들의 긴 한숨과 냉소적인 다그침에 의해 봉쇄당한다. 미성년이라는 특정 연령층이 불완전함이나 미성숙함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타의에 의해 조금 빠른 속도로 본인의 연령대에서 흔히 발견되는 순수함에서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할 수 밖에 없는 미성년의 모습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그 죄책감의 크기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시사하기 위한 운명론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타의에 의해 강요되어진 가족 붕괴의 위기 속에서 강한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려 하는 소녀들의 공동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인과관계로 서사구조를 단단히 붙들어 매는 가운데 배우들의 호연과 배경이 되는 동네 그 자체의 얼굴을 통해 많은 감정을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Our Home’이 아니고 ‘The House of Us’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상자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물질적 공간 속에 무언가를 담아내거나 덜어내고 싶어하는 소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집에 놀러와”의 그 ‘집’이 갖는 물질성, “저녁은 가족이 함께 먹어야지”에서 드러나는 저녁식사 식탁이 갖는 그 물질성이 소녀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김보라 | 벌새

김보라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밝혔던 것처럼, [벌새]는 불안하고 서늘하지만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다. 영화는 중학생 여자아이의 등 뒤를 조용히 쫓으며 그녀가 겪는 세상의 편협함과 폭력성을 가만히 비추는 동시에 그 거친 세상에서 날개짓을 바삐 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주인공 은희가 2년째의 중학교 생활을 견디어 내는 1994년은 해방 이후 진화해온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인 병폐들이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은채 그 존재감을 뽐내며 이곳 저곳을 괴롭히고 다니던 시기였다. 그 병폐들이란 가족 단위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제와 가정폭력, 가정과 학교가 합심하여 힘을 발휘한 학력제일주의, 사회 차원에서 비극을 초래하는 인자였던 안전불감증과 개발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등으로 간추려질 수 있을텐데, 은희는 그 모든 것의 총집체이자 상징이었던 대치동의 고층 아파트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버지로부터 서울대 진학이라는 꿈을 부여받지만 공부를 아주 썩 잘하지 못하는 오빠는 은희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8학군에 진학하지 못한 언니는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집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 은희 역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삐삐로 ‘1004 486’ 메시지를 보내는 남친과 한문학원에서 키득거리를 수 있는 단짝 친구가 있으니 불안하고 서늘한 현실을 어느정도 버티어 낼 수 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치고 불안함을 따뜻함으로 둘러치던 은희의 삶에 몇가지 파장이 발생한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자신의 딸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여대생’이 되길 바라는 엄마나 옆에 앉은 ‘날라리’를 적어내라고 강요하는 학교 선생님 등, 주변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른들과 달리 20대 여성인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는 은희에게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묻고, 그 누구에게도 맞지 말라고 용기를 준다.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자신의 10대 시절 만난 각자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렸거나, 영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자시의 10대 시절을 위로했을 것이다. 은희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 영지 선생님은 영화에서 유독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비추어지는데, 천국에서 홀연히 날아와 숨을 불어넣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천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생각되는 한편, 은희에게 철거농성장의 현수막의 의미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서 언급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사회적인 비극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 개인과 그녀를 둘러싼 불안한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가교로 기능하기도 한다. 어쩌면 미래의 은희가 과거의 은희에게 잠시 돌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은희의 신체에도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귀 뒤에 혹이 생겨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간단한 수술이라 하지만 수술은 수술인지라 가족들은 자신을 때린 오빠를 두둔하던 아버지는 병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목놓아 불러도 대답이 없던 엄마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영화 속에서는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수술에서 깨어난 은희가 주변 사람들(아마도 간호사)에게 떼어낸 혹을 어찌 했는지 묻고, 그 혹을 버렸다는 말에 ‘왜’냐고 반문하는 대목에서 이 일화는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지금까지 은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인자들이 조금씩 제거된다는 차원에서 그녀의 서늘한 마음을 조금을 덜어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은희는 집을 잘못 찾는 바람에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엄마를 만날 수 없다. 영화 중간, 어딘가를 멍하게 쳐다보는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는다.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조금 더 센 힘을 가진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늘 묵살당한다. 은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는 우울함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일정 부분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귀 뒤에 붙어있는 혹을 제거하면서 그 부분이 조금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수학여행 장면에서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엄마는 딸을 위해 김밥을 싸주고 아빠는 경주에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당부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은희는 혼자이지만, 주변 친구들을 바라보면서도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조금 마음이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있다. 불안하고 서늘한 10대 시절을 통과해야 하는 은희의 마음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친구가 있어 좋고 남친이 있어 좋지만, 좋아하는 영지 선생님은 더이상 만날 길이 없고 지난 학기 고백 받았던 후배는 어느새 마음을 정리해버렸다. 멍청한 남친은 언제 다시 바람을 피울지 모르고 그의 어머니는 떡집 딸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날개짓을 열심히 한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한다. 은희의 마음속에 툭 끊어진 부분, 단절된 부분이 성수대교의 끊어진 부분으로 상징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은희의 뒷모습을 가만히 조망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양이, 은희의 앞모습을 지긋이 비춘다는 점에서 허우샤오시엔이 생각났고, 지옥같은 십대를 사회상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는 [파수꾼], [릴리슈슈의 모든 것] 등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영화의 색깔을 빌려다 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한 오리지널리티가 있고,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여성주의 영화로 읽어도 의미있는 지점을 많이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원이 깊고 다양하다. 1994년을 힘들게 이겨낸 은희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자기만한 딸을 하나 두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힘든 시절을 이겨낸 여성 모두에게 바치는 조용한 위로같은 영화다.

라야 | 집의 시간들

건축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파트의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공급되기 시작한 시점과 여러가지 – 한국사회의 조급증, 비리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날림 시공 등,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세차익에 대한 숭배현상 – 를 고려한 한국 아파트의 일반적인 수명 등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 특히 서울에서 두 세대 이상 한 아파트 단지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의 수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봤다. 만들어진지 대략 3-40년 쯤 된 아파트는 거의 대부분 허물어지기 마련인데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기간도 대략 그 쯤 되니, 정말 운이 좋지 않고서는 나의 부모가 태어난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나의 부모가 뛰어 놀던 놀이터에서 성장한 사람은 정말 진기한 체험을 한 셈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세대 간 단절을 촉진하는 것에 온 신경이 팔려있다. 과거의 유산은 다음 세대에서 깡그리 무시되기 일쑤며, 수많은 사람들의 손떼가 뭍어 있는 거리와 건물은 너무나 쉽게 부수어지고 사라져 간다. 가뜩이나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집단적 기억의 전승에 대한 가치마저 얕게 대한다면, 대체 이 사회는 어떤 동력을 이용하여 성장할 것인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재건축! 시세차익!)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한시간이 조금 넘는 짤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송파구와 경계선을 대고 있는 강동구의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둔촌주공아파트는 5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최근 재건축이 결정되어 공사에 들어갔고, 조만간 1만세대가 넘는 대규모 신축 아파트 단지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수십년간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나무들도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그 공간의 거의 모든 기억들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한 영화이자,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 단지에서 느꼈던 것들을 보관하고자 하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열명 남짓한 인터뷰이들은 자신이 살던 공간을 얼굴 대신 보여주며 좋았던 기억, 좋지 않았던 기억, 앞으로 삶에 대한 걱정과 기대 등을 담담하게 구술한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서울에서 집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다. 누군가는 이 곳에서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는 뒤늦게 단지에 들어와 텃새를 경험해서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자산 가치가 상승하니 결국 좋을 것이라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이도 있고, 단지 뒷편에 있던 오솔길을 걷는 것이 참 좋았다는 기억을 공유하는 이도 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집이다. 내 몸뚱아리 하나 누일 수 있는 작은 곳, 그 곳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40년 가까이 수만명의 삶을 보듬어 안던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이제 폐기물처럼 어딘가로 버려지고 있다. 결국 하나의 순환주기에 따라 벌어져야만 하는 일이라지만, 집의 가치가 반드시 통화가치로 환산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라야 감독은 흔들리지 않는 곧고 바른 카메라의 시선과 그 곳에 살던 이들의 목소리의 힘을 바탕으로 집이 품은 시간의 가치가 사실 꽤 다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이 둔촌주공아파트는 조합원 분양권이 현재 15억에서 20억원에 팔리는 등 상위계층을 위한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거기서 살게된 이들은 똑같은 공간에서 0부터 다시 역사를 쌓아올려야 한다. 심지어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은 반드시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차가운 단절의 순간이 서울에서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아 슬프다.

강남좌파의 현실과 한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장관 청문회 문제로 뉴스판이 떠들썩하다. 후보자를 둘러싼 여러가지 의혹들과 그 해명을 지켜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후보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공무원으로서의 업무 적합성 등이 청문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질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분위기는 전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듯 보인다. 후보자로서 하자가 있는지 여부가 정쟁의 중심에 있는 모양인데, 그 하자라는 것조차 법적인 기준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정서”와 같은 모호한 개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논쟁의 차원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후보자는 오래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 정권을 옹호해 왔다는 점에서 유시민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유시민이 제도권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느끼고 직접 노무현을 돕기 위해 직접선거를 거쳐 국회를 통해 정치판에 뛰어든 것과는 달리, 조국은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 위에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해외 사업자 기반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여 목소리를 높이다 선출직 공무원으로 이 ‘판’에 들어왔기에 그 결이 꽤 명확히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즉,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회적 위치는 두 인물이 서로 공유하는 지점일지 모르나, 정치판의 거물로 성장하기 까지 지나온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나는 그 성장과정이 조국을 유시민과 구분짓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이 조국과 조국을 지명한 현 정권이 현재 어려움을 겪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조국과 같은 성장배경과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을 ‘강남좌파’라 부른다. 재단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뛰어난 학업능력을 바탕으로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일찌감치 획득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는, 이 ‘강남’이라는 요소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뻔한 성공담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상위계급의 이너서클 안에 갇혀 우경화하지 않고 하위계층을 위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낸 ‘좌파’ 이미지가 합쳐질 경우 대중에게 꽤 신선한 매력을 선사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가진 인물이 소셜미디어에서 스타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개인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서 아직 의미가 있다면, 조국이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그를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의 성취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즉 기득권층에 야합하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꽤 쿨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며 충분히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평생 학계에만 있어 국가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전무한 그가 선출직 공무원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온라인에 형성된 그에 대한 강한 지지와 믿음이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전문성보다는 그의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더 강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타이틀은 공직자로서의 전문성을 최소한으로 담보하는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 이렇게까지 거물이 된 배경의 한편에는 검찰을 필두로 한 현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부와 검찰이 신뢰를 잃는 현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데, 조국은 어느 순간부터 많은 대중이 ‘개혁’하기를 바라는 검찰의 반대편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교수 시절 실제로 검찰개혁 등에 대해 꽤 많은 목소리를 내어 왔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민정수석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마냥 맹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청문회에서 조국의 ‘하자’가 공격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향한 대중의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온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발견될 수록, 그리고 그가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자녀에게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증여하려한 정황이 포착될수록, 결국 그 역시 ‘좌파’라는 이미지 안에 감추어진 ‘강남’으로서의 속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렇고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실망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후보자의 해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 실제 불법으로 드러난 것은 현재까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후보자측이 청문회에서 불법성 여부를 중심으로 방어하기 시작한다면 패착이 될 확률이 높다. 대중은 그가 여전히 다른 ‘강남’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고, 이는 다분히 감정적이며 정치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황교안 역시 법무부장관 후보자 시절 청문회를 거쳤다. 그도 ‘강남’이었고, 부동산 투기부터 고액 변호사 수임료 문제까지 불편한 과거가 꽤 여럿 드러났음에도 장관직에 임명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국민 모두가 그를 노골적인 ‘강남’으로만 생각했지, 그에게 약자를 향한 애정이라던가 소수자를 위한 법재정 의지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속한 세상에서 자유로웠다. 조국은 다르다. 그는 사회적 올바름, 정의의 공평한 실현, 경제적 평등 추구라는 다른 세계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 특히 그가 되려 하는 법무부장관의 경우 공직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모두에 속해있는 만큼, 후보자의 삶 자체에서 대중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황교안이 뼛속까지 강남우파를 대변하는 꼴통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후보까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면, 조국은 공정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와중에도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을 셀링포인트로 내세울 수 밖에 없는 어려운 포지션을 스스로 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조국의 인생은 남들보다 쉬었으며, 그의 딸 역시 남들보다 쉬운 길을 걸어왔다. 불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깨를 내어 함께 행진하고자 하는 그의 ‘동지’들보다 훨씬 쉬운 길을 기득권 세력이 좋아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편취해왔다면, 그 자체로 조국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이 점이 유시민과 조국을 나누는 경계선이며, 노무현과 문재인이 왜 여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지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좋은 지점일 것이다. 대중이 전처럼 조국에게 그들의 어깨를 내어줄까? 단지 문재인이 지명한 후보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현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그리고 지금까지 현 정부가 펼쳐온 정책들은 어떤 차원 안에서 나름의 최선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정책, 대북정책, 통상정책 등등, 다른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면 분명 이보다 더 못한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정책도 많았고, 오판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결정도 많았다. 하지만 이건 그들이 가진 인간적 한계때문이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거나 특정 기업, 혹은 세력과 결탁하기 위한 목적에서 벌어진 의도된 실패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책적 실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국민은 그 실패를 용납해야 한다. 이명박이나 최순실처럼 개인적 욕심을 위해 나라 정책을 움직이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으나, 단순한 정책 실패 한 두개로는 나라가 망하진 않는다. 현 정권은 그러한 차원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 후보자 문제도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편이다. 법무부장관이 무척 중요한 자리이긴 하지만, 조국이라는 개인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사법정의 전체가 흔들리거나, 혹은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국으로 상징되어 한동안 꽤 트렌디한 브랜드로 이름을 날렸던 ‘강남좌파’라는 특정 사회계층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조 후보자 문제를 현 정권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기보다는, 현 정권의 핵심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이들이 가진 민낯이 과연 어떤 색깔일까,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