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 우리들

[우리집]을 보고 서둘러 [우리들]을 챙겨보았다. [우리들]과 [우리들]은 연작이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케이션 장소(찾아보니 정릉 일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를 공유하고 [우리들]의 주연 배우들이 [우리집]에서 똑같은 이름을 달고 잠깐씩 모습을 비춘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일한 세계관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우리집]이 무너져가는 가족의 불안함을 몸으로 느끼며 아둥바둥거리는 애어른들의 이야기라면,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완고한 미성년의 자장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 주고받는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으로의 성장을 강요받지 않았다 해서 이들이 맺는 관계성이 미숙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시작부터 파탄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법적인 성년들이 맺는 관계의 일반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겪는 관계의 서투르고 폭력적인 끝맺음을 비껴나가며 오히려 더 완숙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에서 대부분 쉽게 잊혀지거나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한, 우리가 ‘평범’하다고 대충 규정 지어 표현하는 어린 영혼의 섬세하고 소중한 마음을 따뜻하지만 에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된다. 이 영화가 가진 폭발적인 힘은 이 ‘옆에 있어 주는 시선’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 생각났다.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지만 아이가 거칠게 다루어지면 바로 옆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반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아이의 열심한 마음을 바라본다. 감독의 그 시선이 참 좋았다.

반마다 그런 애들이 있었다. 공부는 중하위권, 얼굴도 외모도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이 아니고, 집은 잘 살지 못해 부모의 온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말에 자신의 옷에서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하는, 그런 애들이 있었다. 뭐 하나 특출난 것이 없으며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 이 아이들은 조금 더 영악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의 쉬운 표적이 된다. 때로는 본인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채, 텅빈 주변에 단 한명의 친구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힘이 되어 주었던가. 혹시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어떤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거절하지는 않았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치며 반성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쳐 지나온 ‘기회’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왜 나는 손을 먼저 내밀지 못했던가. 영화의 주인공 선만큼 용기를 내지 못한 내가 미워졌다.

마츠오 코우 |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

나의 첫번째 건담은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였다. 1988년 무렵,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식 수입이 불법이었던 시기, 서점에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캡처하고 대사를 엮어 책으로 만들어 팔던 때였다. 그 이유와 목적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데리고 무궁화호 열차를 타야 했던 어머니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 [역습의 샤아] 캡처본 책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이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미래의 역사를 배우듯, 나와 같은 한국의 아이들은 조악한 화질로 녹화된 [건담] 시리즈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미래의 역사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우주세기연표와 1년전쟁, 아무로 레이와 샤아를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모든 건담시리즈를 챙겨볼 정도로 푹 빠지진 않았지만, 건담 시리즈와 모빌 슈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 중 한 챕터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는 건담의 정사(正史)의 출발점인 1년 전쟁과 그 시간을 공유하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일종의 평행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주세기에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다른 건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약간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군살 없이 단순하되 충분히 흥미롭다. 공격하는 연방군과 지키려는 지온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연일 벌어진다. 프리재즈를 좋아하는 연방군 소속 파일럿 이오 플레밍은 전투와 모빌슈트에 미친 사람이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에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는 상관이자 연인 클로디아와는 달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부적인 싸움꾼이다. 이에 대항하는 지온군의 대릴 로렌츠는 비치 보이스 류의 요트 음악을 좋아하는 스나이퍼로, 전쟁 중 두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채 같은 처지인 상이군인 부대에서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서사와 인물, 컷과 씬은 이 두 명의 주인공이 격돌하는 장면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안에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성공적으로 녹여내며 성인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낸다. 유치한 장면은 하나도 없고 재즈와 올드 팝 음악이 번갈아 나오는 OST 역시 훌륭하며,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은 복합적인 인물 묘사 역시 뛰어난 편이다. 특히 나처럼 1980년대 건담 애니메이션에서 그 기억이 멈추어 있는 사람이라면 최신 애니메이션 기술로 되살아난 건담 대 자쿠의 전투신은 영혼을 빼앗아갈 정도의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현재 연재중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다. 아마도 두 주인공의 운명은 이후 꽤 많이 바뀔 것 같다. 이런 류의 작품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현재 애니메이션 후속편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벤디트 플라워]까지 나와 있다.

윤가은 | 우리집

[벌새]에 이어 [우리집]을 연이어 보았다. 아내는 영화 중간 등장하는 대사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럴까?”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벌새]와 마찬가지로 [우리집] 역시 어린 시절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던 공통된 고통의 기억을 집요하게 일깨운다는 점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밑바탕을 가지고 있다. 바쁜 성인의 삶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이 화면에서 되살아날 때, 관객은 어린 배우들의 얼굴에서 그 고통의 세대 간 되물림을 확인하며 연민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귀여운 에피소드와 어린 배우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며 이 영화의 주제가 안고 있는 무게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겠지만, 후반부로 나아가며 영화는 운명론적 비관성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낸다. 관객은 절망감과 당혹감을 느끼며 어린 소녀들이 보여준 대안적 가족으로서의 연대의식과 전통적 형태의 가족에 대한 희미한 희망만으로 과연 안심을 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한다. 상자, 요리, 저녁식사, 휴대폰 등으로 상징되는 가족 구성원 간 안정적 관계에 대한 소녀들의 열망은 어른들의 긴 한숨과 냉소적인 다그침에 의해 봉쇄당한다. 미성년이라는 특정 연령층이 불완전함이나 미성숙함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타의에 의해 조금 빠른 속도로 본인의 연령대에서 흔히 발견되는 순수함에서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할 수 밖에 없는 미성년의 모습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그 죄책감의 크기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시사하기 위한 운명론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타의에 의해 강요되어진 가족 붕괴의 위기 속에서 강한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려 하는 소녀들의 공동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인과관계로 서사구조를 단단히 붙들어 매는 가운데 배우들의 호연과 배경이 되는 동네 그 자체의 얼굴을 통해 많은 감정을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Our Home’이 아니고 ‘The House of Us’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상자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물질적 공간 속에 무언가를 담아내거나 덜어내고 싶어하는 소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집에 놀러와”의 그 ‘집’이 갖는 물질성, “저녁은 가족이 함께 먹어야지”에서 드러나는 저녁식사 식탁이 갖는 그 물질성이 소녀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김보라 | 벌새

김보라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밝혔던 것처럼, [벌새]는 불안하고 서늘하지만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다. 영화는 중학생 여자아이의 등 뒤를 가만히 쫓으며 그녀가 겪는 세상의 편협함과 폭력성을 가만히 비추고, 그 거친 세상에서 날개짓을 바삐 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주인공 은희가 2년째의 중학교 생활을 견디어 내는 1994년은 해방 이후 진화해온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인 병폐들이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은채 그 존재감을 뽐내며 이곳 저곳을 괴롭히고 다니던 시기였다. 그 병폐들이란 가족 단위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제와 가정폭력, 가정과 학교가 합심하여 힘을 발휘한 학력제일주의, 사회 차원에서 비극을 초래하는 인자였던 안전불감증과 개발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등으로 간추려질 수 있는데, 은희는 그 모든 것의 총집체이자 상징이었던 대치동의 고층 아파트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버지로부터 서울대 진학이라는 꿈을 부여받지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는 오빠는 은희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8학군에 진학하지 못한 언니는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집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 은희 역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1004 486’ 메시지를 보내는 남친과 한문학원에서 키득거리를 수 있는 단짝 친구가 있으니 불안하고 서늘한 현실을 어느정도 버티어 낼 수 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치고 불안함을 따뜻함으로 둘러치던 은희의 삶에 몇가지 파장이 발생한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자신의 딸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여대생’이 되길 바라는 엄마나 옆에 앉은 ‘날라리’를 적어내라고 강요하는 학교 선생님 등, 은희의 주변에 머물던 완고한 어른들과 달리 20대 여성인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는 은희에게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묻고, 그 누구에게도 맞지 말라고 용기를 준다.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자신의 10대 시절 만난 각자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렸거나, 영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자시의 10대 시절을 위로했을 것이다. 은희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 영지 선생님은 영화에서 유독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비추어지는데, 천국에서 홀연히 날라와 숨을 불어넣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천사처럼 느껴진다. 강하고 노골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생각되는 한편, 은희에게 철거농성장의 현수막의 의미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서 언급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사회적인 비극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 개인과 그녀를 둘러싼 불안한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가교로 기능하기도 한다.

은희의 신체에도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귀 뒤에 혹이 생겨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간단한 수술이라 하지만 수술은 수술인지라 가족들은 자신을 때린 오빠를 두둔하던 아버지는 병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목놓아 불러도 대답이 없던 엄마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영화 속에서는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수술에서 깨어난 은희가 주변 사람들(아마도 간호사)에게 떼어낸 혹을 어찌 했는지 묻고, 그 혹을 버렸다는 말에 ‘왜’냐고 반문하는 대목에서 이 일화는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지금까지 은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인자들이 조금씩 제거된다는 차원에서 그녀의 서늘한 마음을 조금을 덜어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은희는 집을 잘못 찾는 바람에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엄마를 만날 수 없다. 영화 중간, 어딘가를 멍하게 쳐다보는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는다. 폭력에서 구원해달라고, 조금 더 센 힘을 가진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늘 묵살당한다. 은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는 우울함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일정 부분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귀 뒤에 붙어있는 혹을 제거하면서 그 부분이 조금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수학여행을 가는 장면이 이를 한번 더 정리해준다. 엄마는 김밥을 싸주고, 아빠는 경주에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당부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은희는 혼자이지만,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 마음이 놓인다.

마지막으로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있다. 불안하고 서늘한 10대 시절을 통과해야 하는 은희의 마음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친구가 있어 좋고 남친이 있어 좋지만, 좋아하는 영지 선생님은 더이상 만날 길이 없고, 지난 학기 고백 받았던 후배는 어느새 마음을 정리해버렸다. 멍청한 남친은 언제 다시 바람을 피울지 모르고 그의 어머니는 떡집 딸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은희의 마음속에 툭 끊어진 부분, 단절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성수대교의 끊어진 부분으로 상징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고, 그렇게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은희의 뒷모습을 가만히 조망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양과 허우샤오시엔이 생각났고, 지옥같은 십대를 사회상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 [파수꾼], [릴리슈슈의 모든 것] 등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영화의 색깔을 빌려다 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한 오리지널리티가 있고,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여성주의 영화로 읽어도 의미있는 지점을 많이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원이 깊고 다양하다. 1994년을 힘들게 이겨낸 은희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자기만한 딸을 하나 두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힘든 시절을 이겨낸 여성 모두에게 바치는 조용한 위로같은 영화다.

라야 | 집의 시간들

건축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파트의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공급되기 시작한 시점과 여러가지 – 한국사회의 조급증, 비리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날림 시공 등,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세차익에 대한 숭배현상 – 를 고려한 한국 아파트의 일반적인 수명 등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 특히 서울에서 두 세대 이상 한 아파트 단지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의 수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봤다. 만들어진지 대략 3-40년 쯤 된 아파트는 거의 대부분 허물어지기 마련인데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기간도 대략 그 쯤 되니, 정말 운이 좋지 않고서는 나의 부모가 태어난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나의 부모가 뛰어 놀던 놀이터에서 성장한 사람은 정말 진기한 체험을 한 셈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세대 간 단절을 촉진하는 것에 온 신경이 팔려있다. 과거의 유산은 다음 세대에서 깡그리 무시되기 일쑤며, 수많은 사람들의 손떼가 뭍어 있는 거리와 건물은 너무나 쉽게 부수어지고 사라져 간다. 가뜩이나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집단적 기억의 전승에 대한 가치마저 얕게 대한다면, 대체 이 사회는 어떤 동력을 이용하여 성장할 것인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재건축! 시세차익!)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한시간이 조금 넘는 짤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송파구와 경계선을 대고 있는 강동구의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둔촌주공아파트는 5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최근 재건축이 결정되어 공사에 들어갔고, 조만간 1만세대가 넘는 대규모 신축 아파트 단지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수십년간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나무들도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그 공간의 거의 모든 기억들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한 영화이자,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 단지에서 느꼈던 것들을 보관하고자 하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열명 남짓한 인터뷰이들은 자신이 살던 공간을 얼굴 대신 보여주며 좋았던 기억, 좋지 않았던 기억, 앞으로 삶에 대한 걱정과 기대 등을 담담하게 구술한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서울에서 집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다. 누군가는 이 곳에서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는 뒤늦게 단지에 들어와 텃새를 경험해서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자산 가치가 상승하니 결국 좋을 것이라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이도 있고, 단지 뒷편에 있던 오솔길을 걷는 것이 참 좋았다는 기억을 공유하는 이도 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집이다. 내 몸뚱아리 하나 누일 수 있는 작은 곳, 그 곳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40년 가까이 수만명의 삶을 보듬어 안던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이제 폐기물처럼 어딘가로 버려지고 있다. 결국 하나의 순환주기에 따라 벌어져야만 하는 일이라지만, 집의 가치가 반드시 통화가치로 환산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라야 감독은 흔들리지 않는 곧고 바른 카메라의 시선과 그 곳에 살던 이들의 목소리의 힘을 바탕으로 집이 품은 시간의 가치가 사실 꽤 다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이 둔촌주공아파트는 조합원 분양권이 현재 15억에서 20억원에 팔리는 등 상위계층을 위한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거기서 살게된 이들은 똑같은 공간에서 0부터 다시 역사를 쌓아올려야 한다. 심지어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은 반드시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차가운 단절의 순간이 서울에서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아 슬프다.

강남좌파의 현실과 한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장관 청문회 문제로 뉴스판이 떠들썩하다. 후보자를 둘러싼 여러가지 의혹들과 그 해명을 지켜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후보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공무원으로서의 업무 적합성 등이 청문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질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분위기는 전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듯 보인다. 후보자로서 하자가 있는지 여부가 정쟁의 중심에 있는 모양인데, 그 하자라는 것조차 법적인 기준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정서”와 같은 모호한 개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논쟁의 차원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후보자는 오래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 정권을 옹호해 왔다는 점에서 유시민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유시민이 제도권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느끼고 직접 노무현을 돕기 위해 직접선거를 거쳐 국회를 통해 정치판에 뛰어든 것과는 달리, 조국은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 위에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해외 사업자 기반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여 목소리를 높이다 선출직 공무원으로 이 ‘판’에 들어왔기에 그 결이 꽤 명확히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즉,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회적 위치는 두 인물이 서로 공유하는 지점일지 모르나, 정치판의 거물로 성장하기 까지 지나온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나는 그 성장과정이 조국을 유시민과 구분짓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이 조국과 조국을 지명한 현 정권이 현재 어려움을 겪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조국과 같은 성장배경과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을 ‘강남좌파’라 부른다. 재단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뛰어난 학업능력을 바탕으로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일찌감치 획득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는, 이 ‘강남’이라는 요소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뻔한 성공담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상위계급의 이너서클 안에 갇혀 우경화하지 않고 하위계층을 위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낸 ‘좌파’ 이미지가 합쳐질 경우 대중에게 꽤 신선한 매력을 선사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가진 인물이 소셜미디어에서 스타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개인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서 아직 의미가 있다면, 조국이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그를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의 성취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즉 기득권층에 야합하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꽤 쿨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며 충분히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평생 학계에만 있어 국가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전무한 그가 선출직 공무원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온라인에 형성된 그에 대한 강한 지지와 믿음이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전문성보다는 그의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더 강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타이틀은 공직자로서의 전문성을 최소한으로 담보하는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 이렇게까지 거물이 된 배경의 한편에는 검찰을 필두로 한 현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부와 검찰이 신뢰를 잃는 현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데, 조국은 어느 순간부터 많은 대중이 ‘개혁’하기를 바라는 검찰의 반대편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교수 시절 실제로 검찰개혁 등에 대해 꽤 많은 목소리를 내어 왔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민정수석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마냥 맹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청문회에서 조국의 ‘하자’가 공격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향한 대중의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온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발견될 수록, 그리고 그가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자녀에게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증여하려한 정황이 포착될수록, 결국 그 역시 ‘좌파’라는 이미지 안에 감추어진 ‘강남’으로서의 속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렇고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실망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후보자의 해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 실제 불법으로 드러난 것은 현재까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후보자측이 청문회에서 불법성 여부를 중심으로 방어하기 시작한다면 패착이 될 확률이 높다. 대중은 그가 여전히 다른 ‘강남’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고, 이는 다분히 감정적이며 정치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황교안 역시 법무부장관 후보자 시절 청문회를 거쳤다. 그도 ‘강남’이었고, 부동산 투기부터 고액 변호사 수임료 문제까지 불편한 과거가 꽤 여럿 드러났음에도 장관직에 임명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국민 모두가 그를 노골적인 ‘강남’으로만 생각했지, 그에게 약자를 향한 애정이라던가 소수자를 위한 법재정 의지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속한 세상에서 자유로웠다. 조국은 다르다. 그는 사회적 올바름, 정의의 공평한 실현, 경제적 평등 추구라는 다른 세계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 특히 그가 되려 하는 법무부장관의 경우 공직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모두에 속해있는 만큼, 후보자의 삶 자체에서 대중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황교안이 뼛속까지 강남우파를 대변하는 꼴통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후보까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면, 조국은 공정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와중에도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을 셀링포인트로 내세울 수 밖에 없는 어려운 포지션을 스스로 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조국의 인생은 남들보다 쉬었으며, 그의 딸 역시 남들보다 쉬운 길을 걸어왔다. 불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깨를 내어 함께 행진하고자 하는 그의 ‘동지’들보다 훨씬 쉬운 길을 기득권 세력이 좋아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편취해왔다면, 그 자체로 조국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이 점이 유시민과 조국을 나누는 경계선이며, 노무현과 문재인이 왜 여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지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좋은 지점일 것이다. 대중이 전처럼 조국에게 그들의 어깨를 내어줄까? 단지 문재인이 지명한 후보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현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그리고 지금까지 현 정부가 펼쳐온 정책들은 어떤 차원 안에서 나름의 최선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정책, 대북정책, 통상정책 등등, 다른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면 분명 이보다 더 못한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정책도 많았고, 오판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결정도 많았다. 하지만 이건 그들이 가진 인간적 한계때문이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거나 특정 기업, 혹은 세력과 결탁하기 위한 목적에서 벌어진 의도된 실패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책적 실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국민은 그 실패를 용납해야 한다. 이명박이나 최순실처럼 개인적 욕심을 위해 나라 정책을 움직이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으나, 단순한 정책 실패 한 두개로는 나라가 망하진 않는다. 현 정권은 그러한 차원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 후보자 문제도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편이다. 법무부장관이 무척 중요한 자리이긴 하지만, 조국이라는 개인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사법정의 전체가 흔들리거나, 혹은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국으로 상징되어 한동안 꽤 트렌디한 브랜드로 이름을 날렸던 ‘강남좌파’라는 특정 사회계층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조 후보자 문제를 현 정권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기보다는, 현 정권의 핵심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이들이 가진 민낯이 과연 어떤 색깔일까,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세종시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서울의 스페셜티 커피 문화는 이제 하나의 산업화 단계로 진화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호황(boom)기에 접어든 한국의 모든 산업이 그러하듯, 종사자들의 살림살이는 이와는 상관없이 날로 고달프게 변할 가능성이 높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소규모 스페셜티 로스터리/커피숍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쫓아다니다 보면 숨이 다 찰 지경인데, 이제 한국에도 꽤 널리 퍼져 있는 커피 긱(gig)들도 숨이 차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공급과잉의 기운이 느껴진다. 날로 높아져가는 커피 긱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제 각 로스터리/커피숍은 원산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매주 흥미로운 원두를 가져와 커핑(cupping)을 진행해야 한다. 소수의 커피 전문가들이 행하던 행사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보여주어야 하는 필수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높은 품질을 전제로 하는 스페셜티 커피 산업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결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과당경쟁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커피를 즐기는 모든 이들이 까다롭게 커피 플레이버를 파악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원자재 비용이 높은 산업의 특성상 도심지로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창업자들이 높은 임대료에 시달리게 만든다. 마진율이 높을 수 없으며, 문화의 지속성 역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서울의 주요 스페셜티 커피숍의 수명이 임대기간 단위인 2년보다 월등히 길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서울의 작고 예쁜 커피숍들, 예컨대 성수동의 모멘토 브루어스, 망원동의 퀜치 커피, 신사동의 컨플릭트 스토어같은 가게가 4년 뒤에도 여전히 붐비는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14년 첫번째 전성기를 맞이한 테일러 커피가 이미 한 세대 전의 올드스쿨로 분류되는 이 아찔한 속도감 속에서, 아마 향후 2,3년의 기간 동안 서울의 스페셜티 커피 산업은 첫번째 고비를 맞이할런지도 모른다. 성북구의 리이케(Liike Coffee)나 대흥동 골목으로 숨어들어간 후엘고 커피(Huelgo)와 같은 지역화 전략이 조만간 대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서울 바깥의 모습은 어떨까. 한국의 모든 에너지가 오직 서울의 특정 지역에만 집중된 까닭에 커피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발전양상을 시차를 두고 후행하며, 생/원두의 다양성이나 로스팅 기술, 커피숍 인테리어 등 각 요소들 역시 시차를 두고 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로부터 시작되는 낙수효과, 혹은 파급효과(spill-over effect)의 특성이 강한 것이 이쪽 산업의 모습이다. 대전으로 직장을 옮긴 후 한동안 열심히 커피숍 투어를 다녔다. 이 동네의 커피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서울과 어떤 ‘차이’를 보일지 알고 싶어서였다. 내가 받은 인상은 약간 비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만한 말을 입 밖으로 내어야만 하는 것이 싫지만, 서울과 대전의 스페셜티 커피 산업의 차이는 ‘수준 차이’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커피숍은 생두와 원두의 다양한 맛을 잡아내지 못하고 인테리어에는 정체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객을 배려한 현명한 호스피털리티도 만나보기 힘들다. 다만, 커피숍과 로스터리를 둘러싼 ‘문화’는 질적 수준으로 줄세울 수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서울의 커피 문화를 후행하여 학습하려는 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싶다. 난 아직 대전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이건 평균적인 수준에 대한 이야기이고, 대전에도 눈이 번쩍 띄일만큰 훌륭한 커피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 톨드어스토리가 대표적이고, 최근 새로 문을 열어 방문한 인트라던도 커피맛이 참 좋았다. 앤아워페이스는 매뉴팩트의 원두를 필터드립으로만 제공하는데 커피숍의 분위기부터 커피맛까지 균일한 품질을 자랑한다. 블랙워터포트를 통해 전국으로 원두를 배송하는 임프레션 커피컴퍼니도 빼놓을 수 없다.

세종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세종은 새롭게 만들어진, 어린 도시다. 때문에 이 지역의 역사라던가, 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직 건물만이 지어지고 사람만이 유입되고 있다. 하지만 건물과 사람만 있다면 곧 문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충청도 출신을 기반으로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전구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국가기관과 연구기관이 가장 먼저 들어선 까닭에 수도권에서 신규 유입된 주민들로 인해 전체적인 지적수준이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공급되는 신축 아파트의 여파로 주변 지역에서 값싼 전세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전자를 압도하여 도시 전체의 문화는 대전이나 청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답게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생기가 넘치는 것도 사실이며, 도시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 해보려는 새로운 기운이 곳곳에 퍼져 있다.

세종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그것도 맛있는 커피를 만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종촌동의 알라메다다. 세종시는 새로운 동네가 하나씩 생겨날수록 도시 전체의 중심상권이 이동하는 특징을 지니는데, 종촌동은 도담동, 고운동, 아름동 등과 함께 세종시에서 가장 먼저 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알라메다는 종촌동 중심에 위치한 아주 작은 커피숍이지만,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제공한다. 서울처럼 상큼한 과일향만을 전달하지 않는 중-강배전 로스팅이 특징이다. 세종시에서 ‘커피다운 커피’를 최초로 접한 곳이라 개인적으로 특별하다.

모든 좋은 커피숍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로스팅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에너지 낭비가 될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시에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는 원두로 커피를 제공하는 현명한 커피숍이 꽤 여럿 있는 편이다. 금강을 사이로 남북으로 나뉘는 세종시의 남쪽편에서 가장 훌륭한 커피숍을 이야기할 때 스테이플러(Stapler)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부산의 터줏대감 에프엠(FM) 커피 로스터스의 원두를 사용하며 가끔 게스트빈으로 푸어오버를 제공한다. 훼마(Faema)의 E61을 쓰는데, 서울을 비롯해 전세계의 모든 커피숍 중 가장 맛있는 아메리카노를 이 곳에서 마실 수 있다. 서울산 로스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도 있다. 프릳츠의 원두를 세종에서 만나고 싶다면 정부청사 근처에 있는 카페샘(Saem)에 가면 되고, 리브레의 원두가 그립다면 종촌동에 있는 빵집 로프앤러프(Loaf & Rough)에 가서 커피를 부탁하면 된다. 카페샘은 카페로서는 특이하게 상가건물 고층에 위치해있다. 외부인의 방문과 중,소규모 회의가 잦은 도시의 특성을 고려하여 간단한 회의가 가능한 공간배치가 특징이다. 로프앤러프는 다섯손가락에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적은 테이블을 배치한 작은 공간이다.

세종시에는 심지어 포틀랜드 스페셜티 커피의 터줏대감 코아바(Coava)의 원두를 납품받는 곳도 있다. 교외에 위치한 아크커피(Arc Coffee)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코아바의 특색있는 원두로 무장한 곳이다. 서울처럼 모든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지방에서 커피숍을 운영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차별성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크커피 바로 옆에는 서울에도 매점이 있는 위트러스트 커피가 위치해 있는데, 운이 좋으면 이 곳에서 그 유명한 파나마의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세종시 신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논밭이 펼쳐진다. 교외 지역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창고형 커피숍들로는 한옥을 개조한 클래식, 커다란 창고를 개조한 에브리선데이, 공주가는 길에 위치한 롱디커피 등이 있는데, 커피맛에서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널찍한 공간감, 혹은 인스타용 사진을 원한다면 가볼만 하다. 물론, 좋은 경치를 원한다면 당연히 세종호수공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홀리스커피로 가야 한다.

비록 커피맛은 조금 떨어질 지언정 지역성을 강하게 느끼고 싶다면 중년의 가게주인이 지키고 있는 곳을 가봐야 한다. 국세청 건물이 위치한 새롬동과 한솔동의 경계지점에는 가베예술이라는 조그만 커피숍이 최근 문을 열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이 직접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려주신다.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서울의 뉴웨이브 스페셜티 커피가 아니다. 고전적인 커피잔에 따라내어 커피를 마시는 방법까지 일러주는, 1세대에 가까운 커피숍이다. 강 건너 남쪽에서는 카페공주카페하우프(Howff)에서 비슷한 공기를 접할 수 있는데, 모두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신 중년 이상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서울의 트렌디한 산미에 질렸다면 이 곳에서 중후한 옛날 느낌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

한 도시에서 가장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 스타벅스라면, 그 도시의 다양성과 지역성은 실패한 것일까? 한국에서는 굳이 그렇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서울의 중심가를 제외한다면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방문객의 ‘기대’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부응하는 커피숍은 여전히 스타벅스다. 개인적으로 이 브랜드 특유의 강배전 커피를 굉장히 싫어한다. 커피의 쓴 맛만을 남긴 스타벅스의 강배전은 이제 더이상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곳에 가면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좋은 배경음악과 훌륭한 소음처리, 친절한 호스피털리티(왜 엔제리너스와 홀리스는 이것을 결코 따라할 수 없는 것일까. 세계 8대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리고 콘센트! 커피숍의 존재 목적-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혹은 그 군중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해 우리는 커피숍에 간다-을 따지다 보면 스타벅스가 그 망할 커피맛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피숍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세종도 마찬가지다. 전국 스타벅스 매장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매출을 올린다는 정부청사 근처의 리저브점, 동네 어머니들의 영원한 안식처 종촌점과 새롬점, 그리고 최근에 다정동에 생긴 드라이브 쓰루 지점까지, 세종시의 스타벅스는 시민이 가장 원하는 형태의 커피숍 서비스를 훌륭하게 제공하고 있다.

세종시는 아직 ‘스페셜티 커피’라고 이름 붙일만한 가게가 많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구 30만을 갓 넘긴 신생도시에 많은 것을 바라면 안된다. 아마 위례나 판교를 가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서울에서 차고 넘쳐흘러버린 스페셜티 커피의 맛과 향이 세종시까지 흘러들어오기를 기원해본다. 그래서 세종에 사는 동네 시민들이 쓰레빠를 신고 노트북 하나 덜렁 손에 든 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들어갈 수 있는, 동네 스페셜티 커피숍이 곳곳에 생기기를 바란다. 오늘도 정부청사 스타벅스 리저브에 앉아 일을 하다가 아내에게 농담을 건냈다. 평일 오후, 편한 옷차림(파타고니아), 맥북(프로), 커피숍(공정무역). 볼더의 키워드라고. 세종시도 볼더처럼 느리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좋은 커피와 함께.

구묘진 | 악어 노트

문학도 음악처럼 ‘오버’와 ‘인디’를 구분할 수 있다면, 좋은 ‘인디 문학’ 작품을 만났을 때 쾌감을 꽤 크게 느끼는 편이다. 그 인디 문학작품이 작든 크든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순간도 가끔 일어나는데, 그 때에는 일종의 통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사회의 진화를 추동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과거의 시스템에 구속당하지 않는 창조성이고, 인디 문화는 그러한 긍정적인 에너지의 반동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인디 문학가로서의 개인적인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도 간접적으로나마 잘 알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인디 문학가의 개인적이 삶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가슴 속에는 꽤 깊은 멍자국처럼 먹먹함이 남아있게 된다. 일종의 미안함인 것 같다. 빚을 진 것 같은.

대만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구묘진은 1969년 대만에서 태어나 1995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자살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국립대만대학에 입학하여 대만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문학상까지 수상한 그가 머나먼 타국에서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유를 내가 감히 헤아릴 길은 없겠지만, 남들과 조금 다른 성정체성,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외부세계와의 내적 사투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추측이다. 이른 나이에 생을 거둔 구묘진이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 장편소설 [악어 노트]는 그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으며,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94년에 최초 발표된 이 책은 저자의 죽음과 연계되어 대만 사회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결국 2017년 대만에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이 작품이 알려진 시기도 2017년 즈음이다. 번역가 보니 휴(Bonnie Huie)의 노력으로 미국에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등의 매체의 즉각적인 찬사를 이끌어냈고, 더 펜 번역상 등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두 문단에 걸쳐 구구절절하게 이 책의 배경에 대해 조사한 바를 적은 이유는, “울면서 번역했다”고 말한 영문 번역가 보니 휴, 그리고 “미안하다”고 옮긴이의 말에 적은 한국어 번역가 방철환처럼, 이 책을 읽는 나를 비롯하여 많은 독자들 모두 이 책을 몹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 이유가 위와 같은 시대적 진보와 개인의 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라즈’라고 불리우는 주인공이 적은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대만과 중국어권 사회에서 ‘라즈’는 레즈비언 등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대학교에 막 들어간 첫 학기부터 마지막 학기인 8학기까지의 이야기가 8개의 챕터로 나뉘어 전해지는데, 한마디로 이 책은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자를 사랑하는 본성을 타고난 주인공이 겪는 내적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마음의 병으로 발전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된다. 화자는 멈출 수 없는 불같은 사랑과 그 열병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떠안게 되는 죽음과 가까운 깊이의 절망에 대해 끊이없이 이야기하며, 화자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주인공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인물들이 당면한 죽음으로 가는 이 비극적 길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존재할 뿐, 이 길을 걷는 것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애자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것인데, 주인공 라즈 역시 사랑에 실패한 후 남자를 억지로 만나 ‘여성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일 뿐 본질적인 처방전은 아니며,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구실만 제공할 뿐이다. 당시 구묘진이 느꼈던 대만사회의 폐쇄성이 책의 곳곳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유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읽히는 이 책은 구묘진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전해진다. 구묘진이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몽마르트 유서]와 함께 퀴어 문학에 있어 컬트적인 작품으로 남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전자음악을 하는 키라라가 한 시상식에서 “더이상 친구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한 발언은 그 이후 지금까지 내 마음에 부채처럼 남아있다. 그들이 외부의 차별과 내부의 갈등을 동시에 상대하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키라라같은 이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까지, 나는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이성애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개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Jake Xerxes Fussell | Out of Sight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를 배경으로 활동 중인 포크 음악가 제이크 설서스 퍼셀(Jake Xerxes Fussell)이 2015년 지역 음반사(Paradise of Bachelor)를 통해 발매한 동명의 첫번째 정규음반을 무척 좋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뒤이은 2017년작([What in the Natural World])은 건너 뛰었고, 2년 주기로 올해 발표한 세번째 음반 [Out of Sight]에서 그의 음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퍼셀의 음악은 아메리카나 포크, 혹은 미국 남부 전통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니, “뿌리를 두고 있다”기 보다는 미국 남부음악의 정체성을 온 몸에 뒤집어 쓰고 있는 형국이다. 그의 아버지는 민속학자이자 사진가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더햄에서 태어난 퍼셀은 여느 고고학자/인류학자/민속학자의 가족이 그러하듯 아버지의 탐구활동을 따라 미 알라바마부터 조지아까지 남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다. 아버지가 기록으로 남긴 미국 남부의 다양한 생활상은 퍼셀 음악의 원천이 되었다. 피치포크는 이러한 퍼셀의 음악적 자양분을 문제삼아 그의 음악이 “진짜배기(authentic)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베이루트(Beirut)가 이미 그런 비판의 차원을 넘어선 집시-어메리카나 음악을 선보이듯, 미 남부지역에서 평생을 보낸 퍼셀이 젊은 나이에 관찰을 통해 남부 포크음악을 형상화했다는 이유로 정체성 비판을 하는 것은 동의받기 힘든 부분이 있다. 아무튼, 퍼셀의 음악적 동반자는 기타리스트 윌리엄 타일러(William Tyler)라 할 수 있는데, 현재 퍼셀 음악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은 명상적이고 실험적인 슬라이드 기타 사운드(라이 쿠더의 음악이 떠오른다)를 함께 완성했다.

[Out of Sight]는 미 남부의 전통을 아름답게 묘사한 음반이다. 노래의 제목으로 남부지역의 고유한 지명(“The River St.Johns”, “Winnsboro Cotton Mill Blues”)을 따오거나 남부지역 특유의 여유롭고 낙천적인 생활상을 담아낸 노래를 부르거나(“Drinking of the Wine”), 혹은 블루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Winnsboro Cotton Mill Blues”) 부분에서 음반의 특성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음반에는 총 아홉 곡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음반을 여는 “The River St.Johns”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어깨에 힘이 들어간 곡인데, 청자를 긴장시키며 음반으로 불러들인다. 이 음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퍼셀의 목소리가 주인공, 혹은 간판스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낮은 톤의 푸근한 목소리는 바이올린, 만돌린, 기타, 드럼 등 포크음악의 주요 요소들과 어울리며 하나로 통일된 목가적 심상을 음반 전체에 걸쳐 형상화하는데 이용된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연주곡(“Oh Captain”)도 존재한다. 이렇듯 음반의 초반부는 이러한 심상을 구조화하는데 사용되며, 점층적으로 쌓아올려진 분위기는 “The Rainbow Willow”에서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3분 30초를 넘지 않는 노래가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7분이 넘는 시간을 자랑하는 이 노래는 퍼셀 특유의 목가적인 아메리카나 음악을 강렬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히 음반의 백미라고 칭할 만 하다.

퍼셀의 음악적 파트너 윌리엄 타일러는 한 인터뷰에서 “셀틱 포크(영국 포크음악)나 델타 블루스와 차별화되는 포크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남부군 깃발(Confederate Flag)이 휘날리는 을씨년스러운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지역 특유의 낭만도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그 어떤 지역보다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산다. 경쟁, 유행 등 도시적인 공격성에 쫓기며 살지 않아도 된다. 따사로운 햇살과 눈물이 날 정도로 맑은 공기가 함께 한다. 퍼셀의 음악은 남부의 좋은 점을 음악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Kate Tempest | The Book of Traps and Lessons

새로운 음악을 소개받는 몇몇 소스 중 가장 선호하는 매체 중 하나인 NPR의 [All Songs Considered] 팟캐스트를 통해 케이트 템페스트(Kate Tempest)의 세번째 음반 중 선공개된 “FIresmoke”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이었는데, 저녁 늦게 퇴근해 막 학교를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당시 이 노래를 듣고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는데, 잠시 차를 세워둘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팟캐스트 진행자인 밥 보일린은 1년에 약 500회(!) 정도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노래를 소개하며 무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공연”으로 케이트 템페스트의 SXSW 공연을 꼽았다. 이후 나는 한동안 이 노래만 들었다. 이 노래만 들으며 새 음반이 어서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먼저 발표된 두 장의 음반은 모두 머큐리 음악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전력이 있다. 발표한 모든 정규작이 그 해 영국에서 발매된 대중음악 음반 중 그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어마어마한 레쥬메를 가진 그녀가 발표한 세번째 음반 [The Book of Traps and Lessons]는 템페스트 커리어 최초로 미국인 프로듀서 릭 루빈(Rick Rubin)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다. 릭 루빈이 누구던가. 데프잼(Def Jam) 음반사를 차리고 비스티 보이스나 런 디엠씨의 음반을 제작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기묘한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다.

케이트 템페스트의 이름을 검색하면 많은 매체들이 그녀를 어떻게 분류할지 엄청난 고민을 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선 그녀의 음악을 힙합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첫번째 음반 [Everybody Down]은 상당히 전형적인 힙합 음반이었으므로 그들의 범주화가 틀렸다고 하긴 힘들다. 그녀를 ‘spoken words’ 쪽으로 분류하는 매체도 많다. 두번째 음반 [Let them East Chaos]에서 ‘배경음악’의 형식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랩으로 볼지, 낭송으로 볼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내뱉는 문장, 혹은 이야기들이 대단히 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그녀를 시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바람직해보인다. 실제로 그녀는 음반 뿐 아니라 책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인간관계의 단절과 고독,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세계의 몰락과 같은 비관적인 인식이 우선 존재한다. 그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청자에게 말을 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잘’ 살아가라고.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템페스트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이토록 잔인한데. 나는 이 ‘잘’에 해당하는 디테일이 템페스트 음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99%의 비관 속에 피어오르는 1%의 희망. 그걸 절묘한 단어의 조합으로 전달하는 음악이 케이트 템페스트다.

[The Book of Traps and Lessons]에서는 힙합비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배경음악을 완전히 배제하고 템페스트의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트랙이 있을 정도다. 올드스쿨 힙합의 대부 릭 루빈과 함께 작업했기에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신서사이저 건반이 템페스트의 가장 든든한 동료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와 신서사이저의 불길한 사운드는 세기말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심지어 음반은 11개의 트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구성되어 있다. 음반 제목처럼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이다. 음반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는 “Firesmoke”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 전까지(이 노래가 음반 전체에서 가장 밝고 긍정적이며 활기찬(..) 트랙이다) 이야기가 쭉 한 호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음반을 듣다보면 어깨가 살짝 경직될 정도다. 빠른 속도로 몰입해 들어가 상당히 깊은 차원까지 내려가는 심리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사집을 보며 더듬더듬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실로 ‘시인’에 가까운 예술가라는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대중음악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한 문장을 경험하는 일도 참 드물다. “Firesmoke”보다 뛰어난 노래를 올해 발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