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는 사람

[우리는 안아주는 사람일 뿐]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다.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온 개 하나와,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딸 하나, 이렇게 둘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물론 남편도 있는데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책에는 유기견 센터에 존재하는 ‘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기견센터의 우리는 배설물을 처리하기 위해 바닥에 구멍을 뚫어놓았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유기견들은 제대로 걷기도, 서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러 오거나, 2주 뒤로 정해진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끝낼 때까지.

몇달 전, ‘강아지 병’에 걸린 아내와 함께 대전의 유기견 센터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때의 경험이 잊혀지지 않는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격렬하게 우리를 향해 짖어대는 수많은 유기견들의 울음소리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울음소리는 적대감이나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처음 보는 이 사람들이 자신을 지금 당장이라도 데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을 따라 이 고통 속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 집단적인 절실함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도망치듯 그 곳을 나와야 했다.

이후 우리 부부는 결국 유기견을 데려오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달에도 임신에 실패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둘이서 살고 있다. 아이를 갖기를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아이를 만날 때마다, 교수 휴게실에서 동료, 선배 교수들의 육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지인들의 아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고, 친구나 동료의 육아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위로와 부러움을 건네고, 인스타그램 속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늘 like 버튼으로 화답하지만, 그렇게 사회적 활동을 하는 순간 순간마다 나는 너무 고통스럽고 슬프다. 내가 아직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고, 삼신할매가 우리 부부를 많이 질투해서 이런 것인지 그녀를 만나 따져 묻고 싶다. 나의 부족함과 못남이 결국 우리 부부를 이 고통 속에 빠트린 것 같아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 때도 많다. 최근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마음 속의 괴로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 삶은 이미 아내만으로 충만하게 채워졌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새로운 가족을 절실히 원하지 않게 만든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절실하게 새 가족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가족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하는 상상만으로 이미 너무나 행복해져서 실제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놀라기도 한다. 단지 상상만으로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흔치 않다. 그 새로운 가족이 개였어도, 혹은 아내의 몸에서 태어날 우리를 닮은 사람이었어도, 우리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유기견 센터에서 눈이 마주친 유기견들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동시에 너무나 적막해서 음악이나 TV볼륨같은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집 안의 빈 공간이 내 탓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무겁다. 얼마나 더 절실해져야 하는지, 얼마나 더 절실하게 새로운 가족을 원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다.

레슬리 제이미슨 | 공감 연습

[공감 연습]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레슬리 제이미슨이 주요 매체에 기고한 에세리 11편을 모은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굉장히 러프하게 표현하면 이와 같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지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 자신이 집적 체험한 바를 적나라하게 기술한 수필이기도 하였다가, 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시켜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비평처럼 읽히기도 한다. 특정 공간에 있는, 혹은 특정 병명을 가진 사람을 인터뷰하여 이를 정리하기도 했다가, 어떤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재해석하고 그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매체비평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제이미슨이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고통’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제이미슨이 공통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바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다. 본문에서 몇차레 인용한 수잔 손택이 그녀의 직계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글쓰기 방식을 다양한 대상에 적용하되 11개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퍼져나가지 않고 가지런하게 모여 하나를 비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선명한 주제의식이 모든 글에서 또렷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주제의식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제이미슨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문체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어로 번역된 글에서도 강하게 제이미슨의 색깔이 묻어나온다. 제이미슨의 글은 직설적이되 사려깊고, 풍부하게 쓰이되 독자가 스스로 생각한 의견을 삽입할 수 있을 정도의 여지는 남겨둔다. 그래서 읽는 과정이 즐겁고, 지적으로 흥미로우며,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느낀다. 좋은 에세이인 셈이다. 제이미슨이 택한 에세이의 대상 역시 매우 흥미로운데, 이 책의 제목인 [공감 연습]과 같은 제목을 가진 에세이에서는 의대생의 수업을 도와주는 의료 배우로 일한 경험을 살려 의료과정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택하되,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낙태라는 사건을 삽입함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내재화시키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에세이는 “악마의 미끼”였는데, 모겔론스병(morgellons)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의 다층적인 의미를 깊게 탐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11편의 에세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너무 따분해서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싶은 글도 있었고, 제이미슨 본인의 욕심에 의해 과도하게 일을 벌리다보니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공감 연습]이 최근 읽은 논픽션 중 꽤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안은별 엮음 | IMF 키즈의 생애


“IMF 외환위기”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우는 이벤트가 있었다. 1997년에서 1999년까지, 한국 전역 쯤으로 대충 그 기간과 공간이 정의되고, 대외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기업이 연속적으로 도산하는 가운데 금융기관과 정부기관으로까지 그 여파가 미쳐 자칫하다 국가수준의 채무불이행 사태를 맞이할 뻔 했다는 것이 이 이벤트의 전개과정에 대한 거친 요약이며, IMF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그 이름도 ‘치욕적’인) 구제금융을 공급받음으로써 단기적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단기적인 결론이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IMF로부터 요구받은 노동시장 유연화, 주요기업에 대한 강도높은 구조조정 등의 정책에서 일종의 굴욕감을 느낀 이들은 위의 이야기에 더해 “나의 돌반지를 녹여내어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했다” 따위의, 일제시대에서나 나올법한 무용담을 추가함으로써 나름의 자존감을 유지하려고도 해볼 것이다. 이 이벤트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1998년 이전과 이후 한국사회의 얼굴이 상당히 큰 폭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마 모두가 공통적인 명백한 사실로써 받아들일 것이다. 그 중 누군가는 이 거대한 사회적 변화기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어, 예컨대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면’과 같은 부질없는 가정을 덧대는 방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IMF 키즈의 생애]는 프레시안 기자 출신으로 현재 일본에서 유학중인 안은별이 1980년대에 태어난 7명의 일반인을 인터뷰한 결과물을 엮어놓은 책이다. 위의 문단에 IMF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실어놓은 이유는, [IMF 키즈의 생애]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이 책이, 사실상 ‘IMF 키즈’를 전혀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부각하기 위함이다. 안은별은 1980년대에 태어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재까지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인생사를 수집함으로써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어떤 층위의 공통점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데, 안은별은 그 공통점을 IMF 외환위기라는 하나의 사건을 프리즘처럼 사용하여 정리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결과는 대실패다. 나는 7명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체 왜 이들이 ‘IMF’라는 키워드로 묶여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파악할 수 없었다. 서문에 쓰인 저자의 변을 읽어보면 대충 이러하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IMF 서사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IMF 위기를 단순한 외환 부족에서 일어난, 그것을 갚은 뒤에 진화된 단기간의 사건이 아니라, 전 지구적 변동 속에서 그때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권위주의 개발국가 시스템 자체가 문제시된 사태,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야기한 핵심 계기로 파악하고자 한다.

… 후자는 IMF 경제위기의 해법의 결과로 효율화되고 유연화된 노동시장 구조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노동자로서, 자전적 이야기의 주체로서 주목하고 있다는 데서도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책은 후자의 의미에 훨씬 가깝다.

… 여기서 IMF는 인터뷰이 각자에게 자신이 시간을 보내온 혹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형성되는 ‘사회’라는 것을 떠올리고 자신의 생애를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매개장치다.

정신을 부여잡고 저자가 하려고 했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써보면, 저자는 ‘IMF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를 가진 자’를 인터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트위터에서 만난 저자 나이 또래의 ‘트친’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책으로 내려는 욕망을 솔직하게 밝혔다면, 서문에서와 같은 지면낭비는 최소한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IMF를 개인의 삶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 매개체가 되고 이를 통해 이들을 ‘IMF 키드’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의 IMF 키드는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그 많은 IMF 키드의 생애에서 건져올려낼 수 있는 IMF 외환위기에 대한 함의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역사적인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여기에서는 IMF 외환위기 전개과정에 주로 등장하는 이름들이 될 것이다) 단지 그 시대를 살아낸 필부필부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읽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일반적이고 미시적인 삶에서 효과적으로 건져올려낼 수 있는 확실한 교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럴 수 있을 때에만 어떤 세대에게 합당한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는 ‘IMF 키즈’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7명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IMF라는 이벤트는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희미해져버린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 등장하는 7명 중 상당수가 공무원이나 교사 등, IMF 외환위기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김괜저의 경우에는 뉴욕대까지 유학을 갔는데 2008년 금융위기때문에 집으로부터 송금받는 금액이 많이 줄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98년도 아니고 2008년 당시의 환율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이.. 왜 IMF 키드인지 모르겠다. 황당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중에는 심지어 본인의 선택에 의해 자퇴와 휴학을 반복하다 치과의사로 성공한 여성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고소득자의 삶이 IMF 키즈를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여성’이라는 억지스러운 개념까지 끌어들인다. 여성이니까 조금 더 힘들게 살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데, 그게 여기서 왜 나와! 한마디로 나는 이 책에 ‘낚여’ 버린 셈이다. IMF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분명 의미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홍스시의 기구한 가족사는 그 자체로 뭉툭하게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사는 IMF 이전부터 기구했다. IMF가 무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힘들다. 서유진은 외고를 나와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IMF 외환위기가 “권위주의적 개발국가 시스템”에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 큰 그림 안에서 서유진의 삶은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두고 “실패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IMF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엄마는 IMF 이전부터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이 책은 등장인물의 삶과 IMF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그냥, 그냥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회사생활 관두고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트위터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기자생활하면서, 또 트위터 하면서 만난 친구들과 깊게 이야기하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면서 유학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고. 그냥 그 정도로만 책의 목표를 삼았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인터뷰 모음집이 될 수 있었다. 괜히 어줍잖은 어려운 용어 써가면서 애써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Jessica Pratt | Quiet Signs

Jessica Pratt, [Quiet Signs]

제시카 프랫(Jessica Pratt)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당연히 전자음악이라고 생각했다. 꿈 속을 사뿐히 걷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때문에 드림팝 계열이겠거니, 하고 지레 짐작해버리기 까지 했다. 그녀의 2019년 신보 [Quiet Signs]는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아 따로 챙겨두고 자주 듣게 되었는데, 웬걸, 두번째로 이 음반을 들었을 때 그녀의 음악에는 전자음악기기가 사용되기는 커녕, 드럼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전자피아노 정도는 사용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노래가 통기타 하나로 진행되는 그녀의 음악은 전자음악과는 거리가 한참 먼, 굳이 따지자면 포크음악의 범주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포크음악을 전혀 듣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왜 그 음악적 뿌리를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까? 굳이 변명거리를 찾자면, 제시카 프랫의 음악세계가 하나의 장르로 국한시키기에는 상당히 깊고 다층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단에서 제시카 프랫의 음악을 정의내리거나 어딘가에 포함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단어가 ‘freak folk’, 우리나라 말로 하면 괴물포크(..!)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포크의 하위장르다. 기존의 포크 문법에서 벗어나 사이키델릭한 요소를 잔뜩 첨가한 새로운 포크 운동 정도로 정의내릴 수 있을텐데, 히피 운동이 활발하던 1960,70년대 시작된 이 흐름은 한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1990년대 이후 바쉬티 번얀(Vashti Bunyan)이 발견되고 애니멀 컬렉티브와 그리즐리 비어가 인디씬에서 성공을 거둔 후 현재 인디포크음악의 하위장르로 어느정도 자리를 굳힌 모양새다. 보통 여기에 속한다고 알려진 뮤지션 중 우리가 알법한 인물은 영화 [주노(Juno)]의 음악으로 유명한 킴야 도슨(Kimya Dawson)과 앞서 언급한 그리즐리 비어 등 뉴욕 인디포크씬의 한 무리들을 꼽을 수 있겠고, 범위를 조금 넓히면 조안나 뉴섬과 수프얀 스티븐스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 같다.

LA 출신의 제시카 프랫은 사이키델릭-프릭-안티 등등 새로운 기조의 포크음악 앞에 붙일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충족시키는 음악문법을 구사한다.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사실 가사를 분간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데, 여기에 낯선 밤거리 풍경을 연상시키는 악기들이 소품처럼 배치되어 어둡고 쓸쓸한 정서를 배가시킨다. 전통적인 포크의 색채가 많이 남아있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신보 [Quiet Signs]에서는 몽환적이고 사이키델릭한 특징이 훨씬 강조되고 있는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랫의 목소리 톤도 전작보다 훨씬 높고 가늘게 올라간 듯 느껴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통상적인 드림팝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정서들을 환기시키는 효과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내가 프랫의 음악을 당연히 전자음악이구나, 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이 단순히 어둡고 침침한 것은 아니다. 음반의 색깔은 오히려 축축한 안개가 낮게 깔린 도시의 거리 어딘가에 자리잡은 허름한 펍에서 조곤조곤 나누는 즐거운 수다에 가깝다.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듣다보면 결국 빠져들게 되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있는 음반이다.

애나 보든, 라이언 플렉 | 캡틴 마블

[캡틴 마블] 포스터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소위 DC니 마블이니 하는 그런 류의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적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형식을 차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흥미롭지 않다. 일차원적인 캐릭터와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부터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서사구조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런 류의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예술이 아닌 산업-상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상품이 또 어디있나 싶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꼭 보고 싶었다. 이 영화의 관람 여부가 엉뚱하게 ‘페미니즘’ 분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조차 찻잔 속 태풍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브리 라슨이 과거에 한 발언 등에 근거하여 불매운동을 벌이는 젊은 남성층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가진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지만, 딱 하나, 브리 라슨의 연기력만으로 이 영화는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기존에 보지 못한 복합적이고도 흥미로운 성격의 여성 히어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브리 라슨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뒤뚱뒤뚱 뛰는 모습이 히어로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한 기성언론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 류의 시선이야말로 페미니즘과 여성주의 문화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보수적 남성주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라슨이 연기한 캐럴 댄버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그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 중첩된 성격의 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을 예로 들면, 캐릭터가 가진 불완전한 성장배경과 다혈질(이지만 섬세하기도 한 복합적인) 성격 등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브리 라슨은 아주 엉성한 영화에서 매우 섬세하게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이 영화에서 볼만했던 것은 그거 딱 하나였다.

김현섭, 김기훈 | 오예! 스페셜티 커피!

[오예! 스페셜티 커피]

금호동에 살던 때, 근처에 있는 성수동은 우리 부부에게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콘크리트건물과 아스팔트 도로에 둘러싸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숨쉴 곳을 제공하는 몇 안되는 큰 공원인 서울숲이 있고, 대기업 상권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성동구 조례에 의해 어느정도 보호되는 골목상권이 있으며, (이제는 그 표현이 민망한 정도에 다다른) “서울의 윌리엄스버그” 핫플레이스들까지 있으니, 호기심 많은 신혼부부 입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경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종으로 내려온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소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그 곳의 좋은 가게들이 가끔 생각나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성수동에서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가게는 서울숲 뒷편 택시회사 옆에 자리잡은 작은 커피숍, 매쉬커피다. 다섯명 정도 되는 손님이 들어오면 가게가 꽉 찰 정도로 자그만한 공간을 가진 이 가게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가지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커피 맛이 끝내준다. 산미를 강조하지만 연하고 은은하게 풀어낸 이 가게만의 특유한 추출방식이 내 취향과 딱 맞았다. 둘째, 바리스타 분들이 무척 친절했다. 아내와 가게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젊은 여성 바리스타분이 우리를 반겼는데, 서울에서 방문한 그 어떤 스페셜티 커피숍보다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 우리를 웃으면서 맞이해주었고, 커피 문외한의 엉뚱한 질문에 상냥하고 자세하게 답변해주었으며, 좋은 자리를 추천해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에게 가게를 맡기고(?) 근처 가게에 놀러가던 그 자유롭고 편안했던 ‘환대’의 색깔과 온도가 참 좋았다. 매쉬커피를 혼자 방문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에는 이 [오예! 스페셜티 커피!]의 저자인 남성 바리스타 두 분이 나를 반겼다. 그 때 매쉬커피의 핸드드립 공식(1대 20!)을 직접 배울 수 있었고, 세심하고 친절하게 원두의 특성 및 향미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참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셋째, 멋을 부리지 않아서 좋았다. ‘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울과, 한국인과, 한국문화와 동떨어진 공간디자인과 커피향미를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커피숍이 요즘 너무 많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매출이 확보된다면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매쉬커피는 공간에서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고 털털하게 커피맛 하나만으로 소비자를 응대한다는 점에서 ‘서울에만 존재할 수 있는 진짜 커피숍’이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매쉬커피의 두 바리스타가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서울카페쇼에 갔을 때 살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뒤로 미루었다. 그 당시에는 오히려 언젠가는 반드시 읽게 될 것을 알았기에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비로소 이 책을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기대만큼 재미있고, 기대보다 훨씬 더 좋은 정보를 많이 얻어갈 수 있는 책이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영업비밀(?)을 가감없이 풀어놓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일의 고단함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씀씀이때문인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 과당경쟁, 까다로운 생두수입절차 등 커피숍 운영자로서 경험해야 하는 씁슬한 현실에 대해 너무 무겁지 않게, 시종일관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커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문장마다 절절하게 느껴지지만 책의 어떤 부분에서도 절박함이나 비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커피를 정말 사랑하기에 커피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커피사랑에 동참하게 되어, 어느새 나도 집에 있는 커피도구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고, 저자가 추천해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파나마 게이샤! 파나마 게이샤를 맛보고 싶다!). 한국의 커피업계에서 작지 않은 위치를 가진 저자가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커피를 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 책은, 한국에서 자영업을 고려하는 모든 사람이 읽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꽤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비록 힘들더라도.

요즘에도 가끔 인터넷을 통해 매쉬커피의 원두를 주문해 세종에서 내려마신다. “우리가 다시 금호동에 살 일이 있을까?”라고 아내에게 물어보면, 아내는 단호히 그럴 일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호동보다 집값이 비싸고 공기도 더 나쁜 성수동에서는 더더욱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매쉬커피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혹은 살살 걸어서 ‘동네 단골’ 매쉬커피에 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반갑게 맞이하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서울숲으로 향하는 그 길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숨통

[숨통] 표지

이주자 문학,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문학을 읽을 기회가 생기면 피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읽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대부분이 원문으로 영어를, 문학의 배경공간으로 미국을 택했다. 그만큼 미국이 상대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일까, 강한 자성을 가진 커다란 행성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국부때문일까. 미국에서 오랜 기간 (어떤 종류든) 이민자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소수인종으로서 주류 백인사회를 지근거리에서 경험해보았다면, 그 나라가 대외적으로 자랑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다인종간 공존의 사회적 가치가 실상은 구조적으로 묘하게 뒤틀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인종, 성별, 학벌에 의해 확연히 구분되고, 주류사회로의 편입과정에서 두꺼운 ‘유리장벽’이 존재하며, 백인중심의 획일적인 문화의 강요가 다양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취해지는 사회가 내가 경험한 미국이다. 최근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과 문화적 이질성에서 오는 충격을 전시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을 넘어, 위와 같은 미국사회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프리즘으로도 작동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집 [숨통]은 최근 몇년 간 읽은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을 통털어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가끔 빨리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읽고 싶어지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코맥 맥카시의 장편소설이 그랬고,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그러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또 어떠한가. 한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작가들의 작품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문학적으로 무척 아름답다. 문학이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이유는, 더 나아가 예술의 최전선에서 인간애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맥카시의 건조하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문체, 사려깊고 속정 많은 라히리의 문체, 낭비되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간결하고 완벽한 이시구로의 문체는 모두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을 형성한다. 둘째, 이들의 작품은 세상을 비추는 투명한 창이다.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내딛는 그 발걸음이 언뜻 보기에도 무척 무거워, 한 문장이라도 게으르게 읽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는 내가 있고, 나의 주변이 있고, 내가 속한 사회가 있다. 그 안에서 공감하고 위로받고 반성하게 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은 위와 같은 대가의 미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젊은 작가만이 뿜어낼 수 있는 강렬한 숨결을 추가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집이다.

[숨통]의 단편들은 사려깊게 쓰였고, 용기있게 발언하며, 슬픈 현실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무척 아름다우면서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춘다. 단순히 묘사하고 풍자하는데 그치지 않고 문장 안에 작가의 시선을 녹여내는 시도가 가히 ‘예술적’이다. [숨통]에서 창조된 세계는 결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작가가 경험한 세계를 조금씩 변주해갈 뿐이다. 작가가 성장한 나이지리아의 어지러운 상황과 미국으로 이주한 뒤 경험한 필라델리파와 프린스턴 주변의 이중적인 미국백인사회, 그리고 작가와 작가의 아버지가 살아온 터전인 대학과 교수사회가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된 배경으로 존재한다. 이토록 좁은 배경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야기들이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문학적으로 마법적이기 까지 한데, 이건 순전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개인의 특출난 재능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다른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음에도 한 여성의 내면을 깊숙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격랑을 만들어내는 ‘지난 월요일에’는 여러 뛰어난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아디치에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 개인의 경험이 솔직하게 드러난 듯한 ‘전율’은 소수자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작품이다. ‘미국대사관’은 [숨통]을 관통하는 여러 가치들, 예컨대 아프리카 이민자의 고단한 삶, 나이지리아의 어지러운 정치상황, 아프리카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차별과 학대를 모두 응집한 폭발적인 작품이며, ‘중매인’은 미국사회에서 이민자가 살아가는 두가지 얼굴(철저하게 미국사회에 복종하던지,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만 살아가던지)을 극명하게 대비하며 보여주는 현명한 작품이다. 버릴 단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책장을 넘기는 것이 무척 아까울 정도로 모든 문장이 사랑스럽다는 사실도 놀랍다.

정세랑 | 피프티 피플

몇주 전 아내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추천해주었을 때, 나중에 읽어볼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결국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 당시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이 왠지 [82년생 김지영]과 대구로 읽히는 것 같아 괜히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남주의 화제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꼭 존재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거부할 정도면 [82년생 김지영]의 서투르고 억센 문학성과 폭력적인 일반화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혹은 51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이다.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50여편의 짤막한 단편소설이 조금의 공통분모를 두고 계속 이어지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무척 짧은 단편이 각각 주인공을 한 명씩 가지고 있고, 나머지 50여명 중 누군가가 그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방식이다. 미리 말하지만, 다음 문단에서 하게 될 두어개 정도의 사소한 불평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이 소설집을 무척 좋게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에서 나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고, 51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응집력 있게 잘 뭉쳐져 있는 소설(집)의 짜임새도 마음에 들었다. 짤막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특유의 은율감이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소네트 연작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의 리듬이 뛰어나서 읽는 동안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정세랑은 문장을 참 잘 만들어내고, 이야기도 참 잘 직조해내는 것 같다. 이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스쳐가는 주요한 공간으로 병원 응급실을 택한 것도 현명해보인다. 좋은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열심히 한 티도 많이 난다.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고, 그 이야기를 다시 자기만의 이야기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사소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지만, 51편의 단편 사이에 존재하는 밀도의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먹먹해지거나 실제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진심이 잘 전달되는 반면, 다른 단편에서는 억지로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상적인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건 두번째 불평, 즉 작가가 가진 편향성, 혹은 편견이 글의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혹은 성별, 혹은 그 언저리의 삶에 대한 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주변’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편견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한다. 소설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프로파간다도 재미없고 따분했다. 갑자기 대학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정세랑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더 다양한 인간군상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한국작가는 지금도 많다.

당신이 없는 삶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 밤 우리는 각각 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제출기한이 코 앞으로 다가온 연구계획서를 마무리하느라 나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아내는 그런 나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고 이후 침대로 옮겨졌다. 나는 새벽 세시 쯤 늦은 잠을 청했지만 세시간 쯤 뒤 강제로 깨어나야 했다. 아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눈물을 곧잘 흘리는 그녀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무척 슬픈 꿈을 꾼 모양이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통곡하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킨 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그녀가 잠시 살았던 지난 밤의 꿈에서 나는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고향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미 죽은 남편’ 생각이 났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 아내가 기억하는 꿈의 내용이었다. 다만 그 아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실제로 울기 시작했고,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을 달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으며, 약간의 적응시간을 거친 뒤 다시 살아난(!)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이 그녀가 수도 없이 꾸었을 다른 슬픈 꿈과의 극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것은 ‘남편이 없는 삶’이었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른 편인데,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꽤 쉽게 가정하는 반면(“오늘 출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 뭐.”), 아내는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다(“말이 씨가 된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진지하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정 반대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두렵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잘 살아낸다고 해도 그에 따른 보상(‘천국’과 같은)이 없다면 지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과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내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개념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불교신자였다가 싱가폴 체류 시절에는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남편을 만난 뒤 천주교로 개종하는 등 화려한 종교적 편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의외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약한 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지금 당장의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꽤나 중요한 소명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과의 사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반자,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또다른 나. 그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죽음만이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천주교식 결혼을 한 우리는, 그 문장 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충 짐작해보면 신의 이름으로 허락한 결혼을 인간들끼리 합의하에 무를 수는 없다는 논리같다. 실제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친한 형은 이혼 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몇년 후 ‘복권’되기는 했지만, 교회법상 형은 그 몇년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논리가 아내의 눈에는 꽤 신선하게 비추어졌는지, “죽기 전에는 나랑 헤어질 수 없어”라는 말을 꽤 자주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둘 중 누군가가 죽으면 영원히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있기도 하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것도 두렵고, 나를 두고 아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내를 마음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무한히 사랑하지만, 아내와의 동반자살을 택한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처럼 아내가 없는 삶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강단이 있지는 못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자연이 삶을 허락할 때까지 계속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혼자된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아내를 두고 먼저 떠나는 마음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죄스러울까.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께 당신의 아내인 여사님을 부탁하며 “아내가 술을 좋아하니 가끔 술을 함께 마셔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후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다 함께 모이는 일이 있었는데,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이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시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분들인데, 그날만큼은 미망인이 되신 여사님 앞에서 술잔을 꺾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슬퍼보였다.

오늘 아내는 하루종일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잠시 함께 외출을 할 때에는 이미 퉁퉁 부은 두 눈때문인지 유난히 화장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내 옆에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꼭 붙어 있던 오늘의 그녀 모습은 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전과 같이 맹렬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꿈 속에서나마 내가 없는 삶을 조금 느껴보았기 때문일까. 전과는 다른 애틋함과 절실함이 조금 더 깊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Yorgos Lanthimos | The Favourite

[The Favourite] poster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요즘 영화판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더 랍스터(The Lobster)]부터 [킬링 디어(The Killing of Sacred Deer)]를 지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까지, 큰 실수 없이 착실하게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감정을 숨긴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 새파란 숲, 극단적인 광각 렌즈의 사용 등 란티모스 영화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시각적으로 우선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시각적으로 선사하는 깔끔한 모습은 아주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독창적이진 않다. 란티모스를 동년배의 다른 감독군과 분리시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서사구조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와중에 창의적으로 이끌어내는 선명한 문제제기 능력일 것이다.

그의 세계는 항상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극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은 대립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사람이다.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인물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하며 그 누구도 균열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더 페이버릿]에서는 여왕 앤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누구나 대립관계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친절하게 설명한 뒤 부차적인 장식물은 모두 거세한 채 빠른 속도로 핵심으로 치닫는다. 관객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긴장감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인지 직선적인 서사구조로 인해 지루해할 틈은 없다.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이 세계는 결말에 다다르는 지점에서 갑자기 관객의 현실을 환기시키는데, 나는 이 부분이 란티모스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일그러지는 앤의 얼굴과 마비되어가는 팔, 다리는 잘못된 선택이 연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낡고 굳어버린 처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앤의 사랑을 차지한 한쪽 세계가 많이 행복해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여왕의 무릎 밑에서 짓눌리는 삶을 평생 살아야 한다. 껍데기 뿐인 권력이지만 그 권력의 끄트머리를 부둥켜 잡고 살아야 겨우 생존하는 가냘픈 인생이 이 한쪽 세계의 전부임을, 영화는 꽤 긴 클로즈업을 통해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여왕의 사랑과 권력을 빼앗긴채 이제 모든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다른 세계의 모습이 오히려 더 담담해보인다.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쟁취했지만 불안감에 한 치도 마음 놓을 수 없는 현실, 틀린 것을 알고 있지만 바로잡을 용기가 없는 삶, 지나친 소유욕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알량한 자존심. 그렇게 판타지스럽지 않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이다. [더 페이버릿]은 그런 현실의 누추함을 비추는 현명한 우화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테크닉이 너무 화려하고 뛰어나서 별 네개 이상을 줄 수 없게 만들지만([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문라이트]같은 영화가 내가 별 다섯개를 줄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지적으로 자극이 되는 흥미로운 영화를 계속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